夏四月
에 漢高祖
注+[附註]南漢也라 劉隱之弟니 初名巖이라 梁封隱하야 爲南平王이러니 隱卒에 巖이 繼封爲南海王이라가 丁丑年에 稱帝하고 國號大越하며 戊寅年에 改國號大漢하고 改名하니라 弘度는 龑之子也라 本傳에 龑音嚴이라 殂
하니 秦王弘度 卽皇帝位
하야 更名玢
하다
○ 六月
에 晉主殂
하니 馮道
注+[頭註]守司徒兼侍中이라 與景延廣
으로 議以國家多難
하니 宜立長君
이라하고 乃奉廣晉尹齊王重貴
注+[原註]帝兄之子라[頭註] 廣晉은 本紀에 作大(太)原하니라爲嗣
하니 是日
에 齊王
이 卽皇帝位
하다
晉祖以唐朝
之親
으로 地尊勢重
이어늘 迫於猜疑
하야 請兵契丹
하야 賂以土地
하고 而取人之國
이라
跡其以中國之君으로 而屈身夷狄하면 玩好珍異 旁午道途호되 小不如意하면 譙責繼之하야 當時朝野 莫不痛心이로되 而晉祖事之에 殊無赧色이라
綱目에 書晉上尊號於契丹하고 契丹加晉主尊號는 所以著中國夷狄首足倒懸之極이니 其惡契丹而賤敬瑭也 甚矣로다
○ 晉主之初卽位也
에 大臣
이 議奉表稱臣告哀於契丹
이러니 景延廣
注+[頭註]天平節度使侍衛馬步都虞侯라 이 請致書稱孫而不稱臣
注+[通鑑要解]因契丹主令高祖稱하야 用家人之禮致書也라 하다
契丹
이 大怒
하야 遣使來責讓
이어늘 延廣
이 復以不遜語
注+[附註]延廣이 囚契丹使라가 已而요 遣歸曰 說爾主호되 先帝는 爲北朝所立이라 故로 稱臣奉表어니와 今上은 中國所立이니 稱孫足矣라 翁怒來하면 則孫有十萬橫磨劍이라하니라 答之
하다
契丹盧龍節度使趙延壽
注+[原註]本唐人이니 晉初에 爲契丹所虜하니라 欲代晉帝中國
하야 屢說契丹擊晉
한대 契丹主頗然之
하니라
임인(942) - 진晉나라 천복天福 7년 6월에 진주晉主 석중귀石重貴가 즉위하였다.
○ 한주漢主 유분劉玢의 광천光天 원년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진鎭이다. -
여름 4월에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注+[附註]한漢나라 고조高祖는 남한南漢의 군주이다. 유은劉隱의 아우이니, 처음 이름은 암巖이다. 양梁나라가 유은劉隱을 남평왕南平王에 봉하였는데, 유은劉隱이 죽자 유암劉巖이 뒤를 이어 남해왕南海王에 봉해졌다가 정축년丁丑年(917)에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월大越이라 하였으며, 무인년戊寅年(918)에 국호를 대한大漢이라 고치고 이름을 엄龑으로 고쳤다. 유홍도劉弘度는 엄龑의 아들이다. 본전本傳에 “엄龑은 음이 엄嚴이다.” 하였다. 죽으니,
진왕秦王 유홍도劉弘度가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분玢으로 고쳤다.
6월에
진주晉主(石敬瑭)가 죽으니,
풍도馮道가
注+[頭註]풍도馮道는 수사도守司徒 겸시중兼侍中이다. 경연광景延廣과 함께 의논하기를 “국가에 어려움이 많으니, 마땅히
장군長君(長子)을 세워야 한다.” 하고 마침내
광진윤廣晉尹 제왕齊王 석중귀石重貴를
注+[原註]석중귀石重貴는 황제(石敬瑭)의 형兄(石敬儒)의 아들이다. [頭註]광진廣晉은 〈고조본기高祖本紀〉에 태원太原으로 되어 있다. 받들어 후사로 삼으니, 이날
제왕齊王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경연광景延廣은 〈황제를 세운 것이〉자신의 공이라 하여 비로소 권력을 행사하였다.
“진晉나라 고조高祖는 당唐나라 금련禁臠의 친척(駙馬)으로 지위가 높고 권세가 중하였는데 황제의 시기와 혐의에 핍박을 받아 거란에게 군대를 청하여 토지土地로써 뇌물을 주고 남의 나라를 차지하였다.
중국中國의 군주로서 오랑캐에게 몸을 굽힌 것을 찾아보건대, 완호품과 진귀한 물건을 거란에 바친 것이 도로에 이어졌으나 조금이라도 거란의 마음에 차지 않으면 견책이 이어져서, 당시 조야朝野의 사람들 가운데 가슴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진晉나라 고조高祖는 거란을 섬김에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옛사람은 한 가지라도 불의不義의 일을 행하고 한 사람이라도 무죄한 사람을 죽이고 천하를 얻더라도 오히려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오랑캐에게 붙어서 중국中國을 정벌하고 또 따라서 나라를 차지함에 있어서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진晉나라가 거란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고, 거란이 진주晉主에게 존호尊號를 가했다.’라고 쓴 것은 중국中國과 이적夷狄이 마치 머리와 발이 거꾸로 전도된 것처럼 상하가 도치됨이 극에 달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니, 거란을 미워하고 석경당石敬瑭을 천시함이 심하다.”
진주晉主가 처음 즉위할 적에
대신大臣들이 표문을 받들어 올리고
신臣이라 칭하며
거란契丹에게
상사喪事를 알릴 것을 의논하였는데,
경연광景延廣은
注+[頭註]경연광景延廣은 천평절도사天平節度使 시위마보도우후侍衛馬步都虞侯이다. 〈표문을 올리지 말고〉편지를 보내되
손孫이라 칭하고
신臣이라 칭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注+[通鑑要解]〈경연광景延廣의 의논은〉契丹主가 고조高祖(石敬瑭)로 하여금 아황제兒皇帝라고 칭하게 한 것을 이용하여 가인家人의 예禮를 써서 편지를 보낸 것이다.
거란契丹이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꾸짖자,
경연광景延廣이 다시 불손한 말로
注+[附註]불손한 말이란 경연광景延廣이 거란契丹의 사신을 가두었다가 이윽고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돌아가거든 네 임금에게 말하기를 ‘선제先帝는 북조北朝(契丹)에서 세웠기 때문에 신臣이라고 칭하고 표문을 받들어 올렸지만, 금상今上은 중국中國에서 세웠으니 손孫이라고 칭하면 충분하다. 할아버지(契丹主)가 노하여 와서 교전한다면 손자는 십만 자루의 잘 연마한 검을 차고 상대할 뿐이다.’라고 하라.” 하였다. 답하였다.
거란契丹의
노룡절도사盧龍節度使 조연수趙延壽는
注+[原註]조연수趙延壽는 본래 당唐나라 사람인데, 진晉나라 초기에 거란契丹에게 사로잡혔다. 진晉나라를 대신해서
중국中國의 황제가 되고자 하여 자주
거란契丹을 설득해서
진晉나라를 공격하게 하니,
거란주契丹主가 자못 그 말을 옳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