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是歲에 周代漢하고 北漢建國하니 凡五國, 三鎭이라〉
春正月에 漢監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周라하다
○ 初
에 漢河東節度使兼中書令劉崇
注+[頭註]漢高祖母弟라 이 聞隱帝遇害
하고 欲起兵南向
이러니 聞迎立湘陰公
하고 乃止曰 吾兒爲帝
하니 吾又何求
리오
及贇廢
에 崇乃卽皇帝位於晉陽
하야 更名旻
하고 仍用乾祐
注+[通鑑要解]隱帝年號라 年號
하다
○ 初
에 周主討河中
注+[頭註]己酉年에 節度使李守貞反이어늘 討殺之하니라 하니 已爲人望所屬
이라
李穀이 時爲轉運使러니 周主數以微言諷之호되 穀이 但以人臣盡節로 爲對라
時
에 國家新造
하야 四方多故
어늘 王峻
注+[頭註]左僕射兼門下侍郞이라 은 夙夜盡心
하야 知無不爲
하야 軍旅之謀
를 多所裨益
하고 范質
注+[頭註]戶部侍郞判三司라 은 明敏彊記하야 謹守法度
하고 李穀
注+[頭註]中書侍郞 同平章事라 은 沈毅有器略
하야 在周主前論議
할새 辭氣忼(慷)慨
注+[頭註]忼은 亦作慷하니 竭誠也요 又倜儻貌라 하고 善譬諭
하야 以開主意
하니라
○ 唐主遣邊鎬
注+[頭註]唐主는 李長子璟也요 邊鎬는 信州刺史라 하야 平湖南
注+[頭註]湖南은 楚馬氏라 하고 以鎬
로 爲武安節度使
하다
신해(951) - 주周나라 태조太祖 곽위郭威의 광순廣順 원년元年이다.
○ 북한주北漢主 유숭劉崇의 건우乾祐 4년이다.
○ 이해에 주周나라가 한漢나라를 대신하고 북한北漢이 건국하였으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진鎭이다. -
봄 정월에 한漢나라의 감국監國(郭威)이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주周라 하였다.
처음에
한漢나라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겸중서령兼中書令 유숭劉崇이
注+[頭註]유숭劉崇은 한漢나라 고조高祖(劉知遠)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은제隱帝(劉承祐)가 시해당했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남쪽으로 향하고자 하였는데,
상음공湘陰公(劉贇)을 맞이하여 황제로 삼았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중지하며 말하기를 “내 아들이 황제가 되었으니, 내가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그러다가
유빈劉贇이 폐위되자,
유숭劉崇이
진양晉陽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민旻으로 고치고
건우乾祐라는
注+[通鑑要解]건우乾祐는 은제隱帝의 연호이다.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처음에
주주周主(郭威)가
하중河中을 토벌하니,
注+[頭註]기유년己酉年(949)에 하중절도사河中節度使 이수정李守貞이 반란하자 주주周主가 토벌하여 죽였다. 이미 사람들에게 촉망을 받았다.
이곡李穀이 당시 전운사轉運使로 있었는데, 주주周主가 여러 번 은미한 말로 넌지시 말하였으나 이곡李穀은 단지 ‘신하는 충절을 다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주주周主가 이 때문에 그를 어질게 여겨서 즉위한 뒤에 첫 번째로 등용하여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국가를 새로 세워 사방에 사고가 많았는데,
왕준王峻은
注+[頭註]왕준王峻은 좌복야左僕射 겸문하시랑兼門下侍郞이다. 밤낮으로 마음을 다하여 아는 것을 시행하지 않음이 없어 군대의 계책에 도움이 되는 바가 많았고,
범질范質은
注+[頭註]범질范質은 호부시랑戶部侍郞 판삼사判三司이다. 밝고 민첩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법도를 삼가 지켰고,
이곡李穀은
注+[頭註]이곡李穀은 중서시랑中書侍郞 동평장사同平章事이다. 침착하고 굳세고 기국과 지략이 있어
주주周主 앞에서 의논할 적에 말소리가 비분강개하고
注+[頭註]강忼은 또한 강慷으로도 쓰니, 정성을 다하고 또 기개가 있는 모양이다. 비유를 잘하여 군주의 마음을 열어주곤 하였다.
당주唐主가
변호邊鎬를 보내어
注+[頭註]당주唐主는 이변李昪의 장자長子인 이경李璟이고, 변호邊鎬는 신주자사信州刺史이다. 호남湖南을 평정하고
注+[頭註]호남湖南은 초楚나라 마씨馬氏이다. 변호邊鎬를
무안절도사武安節度使로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