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戊午]〈周顯德五年이라 ○ 唐中興元年이요 南漢主鋹大寶元年이라
三月
에 周世宗
이 如迎鑾鎭
注+[釋義]今眞州是라 五代時에 僞吳置迎鑾鎭이러니 後에 宋改建安軍하고 眞宗時에 陞眞州하니라 하야 屢至江口
하야 遣水軍
하야 擊唐兵破之
하니
唐主聞世宗在江上하고 恐遂南渡하고 又恥降號稱藩하야 乃遣兵部侍郞陳覺하야 奉表請傳位於太子弘冀하야 使聽命於中國하니 時에 淮南에 惟廬, 舒, 鄿, 黃이 未下라
覺이 至迎鑾하야 見周兵之盛하고 白世宗하야 請遣人渡江取表하야 獻四州之地하고 畫江爲境하야 以求息兵호되 辭旨甚哀라
世宗曰 朕本興師는 止取江北이러니 今爾主能擧國內附하니 朕復何求리오
覺
이 拜謝而退
하야 遣其屬劉承遇
注+[頭註]閤門承旨라 하야 如金陵
注+[頭註]唐所都라 이라
世宗이 賜唐主書호되 稱 皇帝恭問江南國主하노라하고 慰納之하다
唐主復遣承遇하야 奉表獻江北四州하고 歲輸貢物數十萬하니
是月
에 浚汴口
하야 導河流
하야 達于淮
하니 於是
에 江淮舟檝(楫)
이 始通
注+[頭註]此卽唐時運路也라 自江淮爲南唐所據로 運漕不通하야 水路湮塞이러니 今復浚之하니라하니라
○ 五月
에 唐主避周諱
하야 更名景
注+[通鑑要解]唐主는 本名璟이니 以周太祖之高祖亦名璟이라 故로 避하니라하다
○ 南漢中宗
注+[頭註]漢晉王晟也라 이 殂
하니 長子衛王繼興
이 卽帝位
하야 更名
하다
무오(958) - 주周나라 현덕顯德 5년이다 ○ 남당南唐의 중흥中興 원년元年이고, 남한주南漢主 유창劉鋹의 대보大寶 원년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진鎭이다. -
3월에
주周나라
세종世宗이
영란진迎鑾鎭에
注+[釋義]영란진迎鑾鎭은 지금의 진주眞州가 이곳이다. 오대시대五代時代에 괴뢰정권인 오吳나라가 영란진迎鑾鎭을 설치하였는데, 뒤에 송宋나라가 건안군建安軍으로 개칭하고 진종眞宗 때에 진주眞州로 승격시켰다. 가서 여러 차례
강구江口에 이르러 수군을 보내
남당南唐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당주唐主는 세종世宗이 강가에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남쪽으로 강을 건너올까 두렵고, 또 황제의 칭호를 폄강貶降하고 번신藩臣을 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병부시랑兵部侍郞 진각陳覺을 주周나라에 보내어 표문을 올려 태자太子 이홍기李弘冀에게 전위傳位할 것을 청하고 태자太子로 하여금 중원中原(周)의 명령을 듣게 하니, 이때 회수淮水 남쪽에 오직 여주廬州‧서주舒州‧기주鄿州‧황주黃州만이 아직 함락되지 않았다.
진각陳覺이 영란진迎鑾鎭에 이르러 주周나라 군대가 강성한 것을 보고 세종世宗에게 아뢰어서 사람을 보내 양자강을 건너가 표문表文을 가져와 네 주州의 땅을 바치고 강江을 국경으로 삼아서 전쟁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내용이 매우 애처로웠다.
세종世宗이 말하기를 “짐朕이 본래 군대를 일으킨 것은 다만 강북江北을 취하려는 것이었는데, 이제 너의 군주가 온 나라를 들어 귀부歸附하니, 짐朕이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진각陳覺이 절하고 사례하고 물러가서 그의 관속인
유승우劉承遇를
注+[頭註]유승우劉承遇는 합문승지閤門承旨이다. 금릉金陵에 보내었다.
注+[頭註]금릉金陵(南京)은 당나라가 도읍한 곳이다.
세종世宗이 당주唐主에게 내린 서신에 이르기를 “황제皇帝는 공손히 강남국주江南國主에게 묻노라.”라고 하여 위무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당주唐主가 다시 유승우劉承遇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강북江北의 네 주州를 바치고 해마다 공물貢物 수십만을 바치기로 하였다.
이에 강북江北이 모두 평정되어 14주州와 60현縣을 얻었다.
이달에
변구汴口를 깊이 파서
황하黃河의 물을 인도하여
회수淮水에 도달하게 하니, 이에
강회江淮의 선박이 비로소 통하였다.
注+[頭註]강회주즙江淮舟檝(楫) 시통始通:이는 당唐나라 때 조운漕運하던 길이었다. 강江‧회淮가 남당南唐에게 점거당한 뒤로 조운漕運이 통하지 아니하여 수로水路가 막혔는데, 지금 다시 통하게 된 것이다.
5월에
당주唐主가
주周나라의
휘諱를 피하여 이름을
경景으로 고쳤다.
注+[通鑑要解]당주唐主는 본래 이름이 경璟이니, 주周나라 태조太祖의 고조高祖도 이름이 경璟이었다. 그러므로 피한 것이다.
남한南漢의
중종中宗이 죽으니,
注+[頭註]남한南漢의 중종中宗은 한漢나라의 진왕晉王 유성劉晟이다. 장자長子 위왕衛王 유계흥劉繼興이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창鋹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