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月
에 以知制誥令狐綯
注+[通鑑要解]令은 音零이니 複姓이라 로 爲翰林學士
하다
上이 嘗以太宗所撰金鏡錄으로 授綯하야 使讀之러니 至亂은 未嘗不任不肖요 至治는 未嘗不任忠賢이라하야늘
上止之하고 曰 凡求致太平은 當以此言爲首라하고 又書貞觀政要於屛風하고 每正色拱手而讀之하니라
○ 秋九月에 再貶李德裕하야 爲崖州司戶러니 卒하다
裴度, 李德裕 皆有功烈하야 爲唐賢相하니 太中以後로 無能繼之者라
蓋度不爲黨而德裕爲黨이라 是以로 度는 雖爲小人所傾이나 而能以功名終하고 德裕는 一失勢而斥死海上也라
雖牛僧孺之黨이 多小人하고 德裕之黨이 多君子나 然其因私以害公하고 挾勢以報怨은 則一而已라
이니 德裕自爲朋黨
하고 而欲罷朋黨
하니 此
는 也
라
又曰
이라하시니 德裕
는 克伐怨欲
을 必行焉
하며 矜而爭
하고 群而黨
하니 豈能免乎
아
2월에
지제고知制誥 영호도令狐綯를
注+[通鑑要解]영令은 음이 령이니, 영호令狐는 복성複姓이다.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임명하였다.
상上이 일찍이 태종太宗이 편찬한 《금경록金鏡錄》을 영호도令狐綯에게 주어 그에게 읽게 하였는데, “지극히 혼란함은 불초한 자에게 맡기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지극히 다스려짐은 충현忠賢한 자에게 맡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내용에 이르니,
상上이 읽는 것을 중지시키고 말하기를 “무릇 태평성세를 이루기를 바란다면 마땅히 이 말씀을 제일로 삼아야 한다.” 하고, 또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병풍에 써 놓고 매양 안색을 엄정하게 하고 손을 모으고서 경건하게 이것을 읽었다.
가을 9월에 다시 이덕유李德裕를 애주사호崖州司戶로 좌천시켰는데 곧 죽었다.
“배도裴度와 이덕유李德裕가 모두 공렬功烈이 있어서 당唐나라의 어진 정승이 되었으니, 태중太中 연간 이후로 이들을 계승할 자가 없었다.
이덕유李德裕는 재주는 배도裴度보다 넉넉하였으나 덕기德器는 배도裴度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배도裴度는 붕당朋黨을 하지 않았으나 이덕유李德裕는 붕당을 하였으니, 이 때문에 배도裴度는 비록 소인小人에게 배척당하였으나 공명功名으로 일생을 마쳤고, 이덕유李德裕는 한 번 권세를 잃자 배척당하여 바닷가에서 죽었다.
비록 우승유牛僧孺의 당黨에는 소인小人이 많고 이덕유李德裕의 당黨에는 군자君子가 많았으나,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하여 공의公義를 해치고 권세를 믿고서 원한을 갚은 것은 똑같을 뿐이다.
오직 천리天吏라야 연燕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데, 이덕유李德裕는 자신이 붕당을 하면서 붕당을 혁파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바로 연燕나라를 가지고 연燕나라를 정벌한다는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남을 이기려 하고 자랑하고 원망하고 탐욕함을 행하지 않으면 어렵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고,
또 말씀하기를 ‘군자君子는 씩씩하나 다투지 않고, 무리 지으나 편당偏黨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덕유李德裕는 남을 이기려 하고 자랑하고 원망하고 탐욕함을 반드시 행하였으며, 씩씩하면서 다투고 무리 지어 편당하였으니, 어찌 화禍를 면할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