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人
이 酷信
注+[頭註]酷은 甚也라 方士之說
하야 而禍敗相踵
하니 向使不妄服食
이면 未必遽殞其生
이라
將以延之라가 適以趣(促)之어늘 而乃覆車相尋하야 恬不知悟하니 豈不深可惜哉아
宣宗이 性明察沈斷하야 用法無私하고 從諫如流하며 重惜官賞하고 恭謹節儉하고 惠愛民物이라
故로 大中之政이 訖於唐亡토록 人思詠之하야 謂之小太宗이라하니라
宣宗之治 以察爲明하야 雖聽納規諫이나 而性實猜刻하고 雖吝惜爵賞이나 而人多僥倖하며
外則藩方
이 逐其帥守
注+[附註]如武寧軍逐其節度使李廓하고 浙東軍逐觀察使李訥하고 湖南軍逐觀察使韓悰하고 江西軍逐觀察使鄭憲之類라 而不能治
하고 內則宦者握兵柄, 制國命
注+[頭註]如王宗實之輩라 을 自如也
라
然이나 百吏奉法하고 政治不擾하야 海內安靖이 幾十五年이러니 繼以懿僖不君하야 唐室壞亂이라
書曰 自成湯으로 至于帝乙히 罔不明德恤祀라하니 若宣宗者는 豈不足爲賢君哉아
상上이 도사道士의 약을 먹고 등에 종기가 나서 8월에 승하하였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으니,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이것을 바꿀 수가 없다.
만약 장생長生을 추구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성인聖人이 이미 먼저 추구하였을 것이다.
당唐나라 사람들은
방사方士의 말을 맹신하여
注+[頭註]혹酷은 심함이다. 화와 패망이 서로 이어졌으니, 그때 만일 함부로 약을 먹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장차 수명을 연장하려 하다가 다만 이로써 수명을 재촉하였는데, 마침내 전복된 수레의 전철前轍(前人의 실패)이 서로 이어져 편안히 여기고 잘못을 깨달을 줄을 몰랐으니, 어찌 깊이 애석할 만하지 않은가.”
선종宣宗은 성품이 명찰明察하고 침착하고 결단력이 있어 법을 적용함에 사사로움이 없고 흘러가는 물처럼 간언을 잘 따랐으며, 관작과 상을 매우 아끼며, 공손하고 절약하며, 백성과 물건을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대중大中 연간의 정치를 당唐나라가 멸망함에 이르도록 백성들이 사모하고 칭송하여 선종宣宗을 일러 작은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선종宣宗의 다스림은 하나하나 살피는 것을 총명함으로 여겨 비록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였으나 성질이 실로 의심하고 각박하였으며, 비록 관작과 상을 아꼈으나 요행으로 등용된 사람들이 많았다.
밖으로는
번방藩方에서
주수主帥(節度使)와
태수太守를 자주 축출하였으나
注+[附註]주수主帥와 태수太守를 축출하였다는 것은 무령군武寧軍은 절도사節度使 이곽李廓을 축출하고, 절동군浙東軍은 관찰사觀察使 이눌李訥을 축출하고, 호남군湖南軍은 관찰사觀察使 한종韓悰을 축출하고, 강서군江西軍은 관찰사觀察使 정헌鄭憲을 축출한 것과 같은 따위이다. 이들을
치죄治罪하지 못하였고, 안으로는 환관들이
병권兵權을 쥐고 국가의 명령을 제재하기를
注+[頭註]국가의 명령을 제재했다는 것은 왕종실王宗實과 같은 무리이다. 예전처럼 하였다.
그러나 백관들이 법을 받들어 시행하고 정치가 어지럽지 않아서 온 천하가 안정된 것이 거의 15년이었는데, 뒤이어 의종懿宗과 희종僖宗이 군주 노릇을 하지 못하여 당唐나라가 무너지고 혼란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대중大中 연간의 정치를 그리워하여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하였다.
《서경書經》 〈다사多士〉에 이르기를 ‘성탕成湯으로부터 제을帝乙에 이르기까지 덕德을 밝히고 제사를 공경히 받들지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선종宣宗과 같은 이는 어찌 현군賢君이라고 할 만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