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月
에 李克用
이 進軍乾阬
하야 與河中, 易定, 忠武軍
注+[頭註]河中將은 白志遷이요 易定은 義武王處存이요 忠武將은 龐從이라 合
하다
尙讓等
이 將十五萬衆
하고 屯于梁田陂
어늘 明日
에 大戰
하야 自午至晡
注+[頭註]日至申爲晡라 하니 賊衆
이 大敗
하다
三月
에 克用
이 進軍渭橋
하야 與黃巢軍
으로 戰于渭南
할새 一日三戰皆捷
하고 義成, 義武
注+[頭註]義成은 節度使王鐸이요 義武는 節度使王處存이라等諸軍
이 繼之
하니 賊衆大奔
이러라
四月에 克用等이 自光泰門으로 入京師하니 黃巢力戰不勝하고 焚宮室遁去하다
於諸將에 最少나 而破黃巢하고 復長安하니 功第一이요 兵勢最强하니 諸將皆畏之하니라
詔以克用爲河東節度使하고 詔以黃巢未平이라하야 加全忠東北面都招討使하다
2월에
이극용李克用이
건갱乾阬으로 진군하여
하중河中,
역정易定,
충무忠武注+[頭註]하중河中, 역정易定, 충무군忠武軍:하중군河中軍 장수는 백지천白志遷이고, 역정군易定軍은 의무군절도사義武軍節度使 왕처존王處存이고, 충무군忠武軍 장수는 방종龐從이다. 등의 군대와 연합하였다.
상양尙讓 등이 15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양전피梁田陂에 주둔하였는데, 다음날 크게 싸워
오시午時부터 저녁 때에 이르니,
注+[頭註]해가 신시申時(오후 4시 전후)에 이르는 것을 포晡라고 한다. 적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3월에
이극용李克用이
위교渭橋로 진군하여
황소黃巢의 군대와
위수渭水 남쪽에서 싸웠는데 하루에 세 번 싸워 모두 이겼으며,
의성義成과
의무義武注+[頭註]의성義成은 의성군절도사義成軍節度使 왕탁王鐸이고, 의무義武는 의무군절도사義武軍節度使 왕처존王處存이다. 등 여러 군대가 계속 이어오니, 적의 무리가 크게 패하여 도망하였다.
4월에 이극용李克用 등이 광태문光泰門을 통해 경사京師(長安)로 들어가니, 황소黃巢가 힘껏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궁궐을 불태우고 도망하였다.
여러 장수 중에 나이가 가장 적었으나 황소黃巢를 격파하고 장안長安을 수복하니 공이 으뜸이었고, 군세가 가장 강성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이극용李克用은 한쪽 눈이 약간 작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독안용獨眼龍이라고 불렀다.
황제가 명하여 이극용李克用을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 삼고, 조서를 내리기를 “황소黃巢가 아직 평정되지 못했다.”라고 하여 주전충朱全忠에게 동북면도초토사東北面都招討使를 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