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在藩邸하야 素嫉宦官이러니 及卽位에 楊復恭이 恃援立功하고 所爲多不法이라
○ 夏四月
에 朱全忠
이 上言
호되 克用
이 終爲國患
이니 今因其敗
注+[頭註]克用이 攻雲州러니 防禦使赫連鐸이 求救於盧龍하야 李匡威將兵三萬赴之하니 克用引還하니라 하야 臣請帥汴, 滑, 孟三軍
과 與河北三鎭
注+[頭註]盧龍李匡威, 成德王鎔, 魏博羅弘信이라 하야 共除之
하노이다
張濬曰 先帝再幸山南
은 沙陁所爲
注+[頭註]沙陁는 謂克用이니 本沙陁人이라 也
라
臣常(嘗)慮其與河朔相表裏
하야 致朝廷不能制
러니 今兩河藩鎭
이 共請討之
注+[頭註]河南朱全忠, 河北李匡威 請討之하니라 하니 此
는 千載一時라
但乞陛下付臣兵柄하시면 旬月可平하리이다 上이 從之하다
○ 五月
에 詔
하야 削奪克用官爵
하고 以濬
으로 爲河東行營招討
注+[頭註]招는 擧也라 制置宣慰使
하다
○ 官軍이 出陰地關하야 不戰而走하고 張濬이 又敗하니 克用이 上表訴寃하다
상上은 번저藩邸에 있을 때에 평소 환관을 미워하였는데 황제에 즉위하게 되자, 양복공楊復恭이 황제를 옹립한 공을 믿고 불법을 많이 자행하였다.
이에 상上이 마음속으로 불평하여 정사를 대부분 재상들과 도모하였다.
여름 4월에
주전충朱全忠이
상언上言하기를 “
이극용李克用이 끝내 국가의 환난이 될 것이니, 이제 그가 패전한 틈을 타서
注+[頭註]이극용李克用이 운주雲州를 공격하였는데, 운주방어사雲州防禦使 혁련탁赫連鐸이 노룡진盧龍鎭에 구원을 청하여 이광위李匡威가 3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달려오니, 이극용李克用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신은
변주汴州,
활주滑州,
맹주孟州 세
진鎭의 군대와
하북河北의 세
진鎭을
注+[頭註]하북河北의 삼진三鎭은 노룡진盧龍鎭의 이광위李匡威, 성덕진成德鎭의 왕용王鎔, 위박진魏博鎭의 나홍신羅弘信이다. 거느리고 가서 함께 그를 제거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장준張濬이 아뢰기를 “
선제先帝께서 두 번이나
산남山南으로 파천한 것은
사타족沙陁族(李克用)이
注+[頭註]사타족沙陁族은 이극용李克用이니, 본래 사타인沙陁人이다.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그가
하삭河朔(河北)과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조정에서 그를 제재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였는데, 지금
양하兩河의
번진藩鎭이 함께 그를 토벌할 것을 청하니,
注+[頭註]하남河南의 주전충朱全忠과 하북河北의 이광위李匡威가 이극용李克用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는 천년에 한 번 있을 좋을 기회입니다.
다만 폐하陛下께서 신에게 병권을 맡겨주신다면 열흘이나 한 달 안에 그들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上이 그의 말을 따랐다.
5월에 황제가 명하여
이극용李克用의 관작을 삭탈하고,
장준張濬을
하동행영초토河東行營招討注+[頭註]초招는 드는 것이다. 制置宣慰使로 임명하였다.
관군官軍이 음지관陰地關을 나가 싸우지 않고 패주하였고 장준張濬이 또다시 패하니, 이극용李克用이 표문表文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