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正月
에 以李茂貞
으로 爲山南西道節度使
하고 以渝州刺史柳
으로 爲瀘州刺史
하다
柳氏自公綽
注+[頭註]玭은 公綽之孫也라 以來
로 世以孝悌禮法
으로 爲士大夫所宗
이라
玭이 爲御史大夫러니 上欲以爲相이나 宦官惡之라 故로 久謫於外하니라
立身行己에 一事有失이면 則得罪重於他人하고 死無以見先人於地下하리니 此其所以可畏也라
門高則驕心易生하고 族盛則爲人所嫉하야 懿行, 實才
를 人未之信
하고 小有
注+[釋義]疵는 才之反이니 玉病也요 纇는 盧對反이니 絲節也라 면 衆皆指之
하나니 此其所以不可恃也
라
故
로 膏粱子弟
注+[頭註]膏는 肥肉也요 粱은 似粟而大하니 米之善者라 는 學宜加勤
하고 行宜加勵
라야 僅得比他人爾
니라
○ 李茂貞
이 恃功注+[頭註]見下壬戌年不臣之心註라 驕橫이어늘 上怒
하고 欲討之
하야
○ 九月
에 以覃王嗣周
로 爲招討使
하야 帥兵三萬
하고 軍于興平
이러니 茂貞
이 約王行瑜
注+[頭註]邠寧節度使라 하야 合兵六萬
하야 以拒之
하니 禁軍
이 皆
望風奔潰라
茂貞等
이 乘勝
하야 進至(二)[三]橋
注+[頭註]在長安西十八里하니라 하니 京師大震
이러라
봄 정월에 이무정李茂貞을 산남서도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로 임명하고, 투주자사渝州刺史 유빈柳玭을 노주자사瀘州刺史로 임명하였다.
유씨柳氏는
유공작柳公綽注+[頭註]유빈柳玭은 공작公綽의 손자이다. 이래로 대대로 효도와 공경과 예법으로
사대부士大夫들에게
존숭尊崇을 받았다.
유빈柳玭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는데, 상上은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환관들이 그를 미워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외지에 좌천되어 있었다.
유빈柳玭이 자제들을 경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문지門地(門閥)가 높은 것은 두려워할 만하고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문벌이 높은 자는〉자기 몸을 세우고 처신함에 한 가지 일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죄를 얻음이 남들보다 무겁고 죽은 뒤에 지하에서 선인先人을 뵐 낯이 없으니, 이것이 두려워할 만한 이유이다.
문벌이 높으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쉽고 가문이 번창하면 사람들에게 질시를 받아서, 아름다운 행실과 진실한 재주를 사람들이 믿지 않고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으면
注+[釋義]자疵는 재지반才之反(자)이니 옥의 티이고, 뇌纇는 로대반盧對反(뢰)이니 실의 매듭이다. 무리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니, 이것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부귀한 집안의 자제들은
注+[頭註]고膏는 살진 고기이고, 양粱은 조와 비슷한데 크니, 고량膏粱은 쌀 중에 좋은 것이다. 학문을 더욱 부지런히 힘쓰고 행실을 더욱 힘써 닦아야 겨우 다른 사람에게 견줄 수 있다.”
이무정李茂貞이 공로를 믿고
注+[頭註]이 내용은 아래 임술년壬戌年(902) ‘불신지심不臣之心’의 주註에 보인다. 교만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자,
상上이 노여워하여 그를 토벌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두양능杜讓能에게 명해서
注+[頭註]두양능杜讓能은 태위太尉이다. 이 일을 전담하게 하였다.
9월에
담왕覃王 이사주李嗣周를
초토사招討使로 삼아 3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흥평興平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이무정李茂貞이
왕행유王行瑜와
注+[頭註]왕행유王行瑜는 빈녕절도사邠寧節度使이다. 약속하고 병력 6만 명을 연합하여 항거하니,
금군禁軍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두려워서 달아나 궤멸되었다.
이무정李茂貞 등이 승세를 타고 전진하여
삼교三橋에 이르니,
注+[頭註]삼교三橋는 장안長安의 서쪽 18리 지점에 있다. 경사京師가 크게 진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