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行瑜, 李茂貞, 韓建
注+[頭註]鎭國節度使라 이 各將精兵數千
하고 入朝
하야 奏稱
호되
南北司互有朋黨
하야 墮(隳)紊朝政
하고 韋昭度討西川
注+[附註]昭度將諸道十餘萬하고 與王建으로 討西川陳敬瑄이로되 三年不能克하니 詔罷兵하다 昭度卽東還하니 王建이 急攻成都克之하고 自稱西川留後하니라[頭註] 韋昭度는 同平章事也라 辛亥年에 以行營招討使山南西道節度使로 討西川하니라 에 失策
하고 李谿作相
에 不合衆心
하니 請誅之
하노이다
上
이 未之許
러니 是日
에 行瑜等
이 殺昭度, 谿於都亭驛
注+[頭註]在朱雀門前西街하니라 하다
○ 李克用
이 大擧蕃漢
注+[頭註]猶言夷夏也라 兵南下
하야 討王行瑜等
하다
十一月에 克用이 進逼邠州어늘 行瑜棄城走하니 克用이 追斬之하다
克用於三鎭에 非有父兄之怨이요 特爲王室雪恥하야 仗義而來어늘 昭宗不明하야 陰疑克用하고 偏黨茂貞하니 他日困辱凶終이 蓋始乎此謀矣니라
克用은 於是에 正當入覲하야 力陳茂貞不誅면 必爲後患之意요
不然이면 將在軍에 君令을 有所不受하나니 蕩淸岐華하고 駐師郊畿하야 釋戎服以見天子하며
身輔朝廷하고 修明紀律하야 使東寇不得西略이면 王室安矣리라
釋此不爲하고 而區區疲力於幽州하고 爭地於慈隰하야 遂使全忠先手하야 遂移唐祚하고 晉陽岌岌하야 幾不自保하니
왕행유王行瑜,
이무정李茂貞,
한건韓建이
注+[頭註]한건韓建은 진국절도사鎭國節度使이다. 각각 정예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입조하여
주칭奏稱하기를
“
남사南司와
북사北司가 서로 붕당이 있어서 조정의 정사를 무너뜨리고 문란하게 하며,
위소도韋昭度는
서천西川을 토벌할 적에
注+[附註][附註] 위소도韋昭度가 제도諸道의 군사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왕건王建과 함께 서천西川의 진경선陳敬瑄을 토벌하였는데 3년이 지나도 점령하지 못하자, 황제가 군대를 파할 것을 명하였다. 위소도韋昭度가 즉시 동쪽으로 돌아오니, 왕건王建이 급히 성도成都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스스로 서천유후西川留後라 칭하였다. [頭註]위소도韋昭度는 동평장사同平章事이다. 신해년辛亥年(891)에 행영초토사行營招討使 산남서도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로 서천西川을 토벌하였다. 실책을 저질렀고,
이계李谿는 정승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부합하지 못하니, 그들을 죽이소서.” 하였다.
상上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날에
왕행유王行瑜 등이
위소도韋昭度와
이계李谿를
도정역都亭驛에서 죽였다.
注+[頭註]도정역都亭驛은 주작문朱雀門 앞의 서쪽 거리에 있다.
이극용李克用이
번한蕃漢(오랑캐와 중국)의 병력을 크게 동원하여
注+[頭註]번한蕃漢은 이하夷夏(오랑캐와 화하華夏)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남쪽으로 내려가서
왕행유王行瑜 등을 토벌하였다.
상上이 이극용李克用에게 명하여 우선 이무정李茂貞을 사면하고 힘을 합쳐 왕행유王行瑜를 토벌하게 하였다.
11월에 이극용李克用이 전진하여 빈주邠州를 핍박하자, 왕행유王行瑜가 성을 버리고 도망하니, 이극용李克用이 추격하여 목을 베었다.
12월에 이극용李克用의 관작을 진왕晉王으로 승진시켰다.
“이극용李克用은 삼진三鎭에 있어서 부형父兄의 원한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 왕실王室을 위해 치욕을 씻고자 하여 의리義理를 내세우고 왔는데, 소종昭宗이 현명하지 못하여 남몰래 이극용李克用을 의심하고 이무정李茂貞을 치우치게 편들었으니, 후일에 곤욕을 겪고 잘 끝마치지 못한 것은 이 모의에서 비롯되었다.”
“이극용李克用이 이때에 바로 입조하여 천자天子를 뵙고서 ‘이무정李茂貞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라는 뜻을 강력히 아룄어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장수가 군軍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기화岐華 지방을 깨끗이 소탕하고 교기郊畿 지방에 군대를 주둔시키고서 군복을 벗고 천자天子를 알현하며,
몸소 조정을 보필하고 기율紀律을 닦고 밝혀서 동쪽 도적으로 하여금 서쪽 지방을 침략하지 못하게 했으면 왕실이 편안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버리고 하지 않고는 구구하게 유주幽州에 힘을 다 쓰고 자주慈州와 습주隰州에서 땅을 다투어 주전충朱全忠이 선수를 쳐서 마침내 당唐나라 왕실이 옮겨가게 하고 진양晉陽은 위급하여 거의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어찌 당초의 계책이 원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