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月에 茂貞이 獨見上하고 請誅韓全誨等하고 與朱全忠和하야 奉車駕還京한대 上喜하야 卽收全誨斬之하고 遣使하야 囊全誨等首하야 以示全忠하다
時에 鳳翔所誅宦官이 已七十二人이요 朱全忠이 又密令京兆하야 捕誅九十人이라
甲子에 車駕出鳳翔하야 幸全忠營이라가 己巳에 入長安하다
國初承平之時에 宦官이 不典兵預政이러니 天寶以來로 宦官寖盛하고 貞元之末에 分羽林衛하야 爲左右神策軍하야 以便衛從이라하야 始令宦官主之하야 以二千人爲定制하니이다
自是로 參掌機密하야 奪百司權하고 上下彌縫하야 共爲不法이라
大則構扇藩鎭하야 傾危國家하고 小則賣官鬻獄하야 蠹害朝政하니 王室衰亂이 職此之由라
不翦其根이면 禍終不已하리니 請悉罷內諸司
하야 使其事務
로 盡歸之省
注+[頭註]寺는 嗣也니 理事者 嗣續其中이라 三公所居曰省이요 九卿所居曰寺라 하고 諸道監軍
을 俱召還闕下
하소서
是日에 全忠이 以兵驅第五可範已下數百人於內侍省하야 盡殺之하니 冤號之聲이 徹於內外라
又出使者는 詔所在하야 收捕誅之하고 止留黃衣幼弱者三十人하야 以備洒掃하니라
蓋以出入宮禁하야 人主自幼及長히 與之親狎하니 非如三公六卿의 進見有時하야 可嚴憚也라
其間
에 復有性識
利
注+[釋義]儇은 呼緣反이니 慧也요 利는 也라 徐廣曰 儇은 謂察慧輕薄小才라 하고 語言辯給
注+[通鑑要解]給은 捷也라 하야 善伺候顔色
하고 承迎志趣
하야
受命則無違忤之患
하고 使令則有稱
之效
하니 自非上智之主 燭知物情
하고 慮患深遠
하야 侍奉之外
에 不任以事
면 則近者日親
하고 遠者日疎
하야 甘言卑辭之請
이 有時而從
하고 浸潤膚受
注+[附註]浸潤은 如水浸灌하야 滋潤漸漬而不驟也요 毁는 毁人之行也라 膚受는 謂肌膚所受 利害切身이니 如易所謂剝牀以膚하야 切近災者也요 愬는 愬己之寃也라 毁人에 漸漬而不驟면 則聽者不覺其入하야 而信之深矣요 愬寃에 急迫而切身이면 則聽者不及致詳하야 而發之暴矣니 二者는 皆難察이니라 之愬 有時而聽
이라
於是
에 黜陟
注+[釋義]黜은 貶也요 陟은 升也라 刑賞之政
이 潛移於近習
이로되 而不自知
하나니 如飮醇酒
에 嗜其味而忘其醉也
라
東漢之衰
에 宦官
이 最名驕橫
注+[釋義]橫은 胡孟反이니 不順理曰橫이라[頭註] 桓帝時는 見卄卷하고 又靈帝時曹節侯覽王甫之類는 見卄一卷하니라이나
然皆假人主之權
하야 依憑城社
注+[釋義]洪容齋曰 城狐不灌하고 社鼠不燻하니 謂其所棲定者 得所憑依니 此古語也라 故로 議論者 率指人君左右近習하야 爲城狐社鼠라 予嘗讀劉向說苑所載하니 孟嘗君之客曰 狐는 人之所攻이요 鼠는 人之所燻이나 臣未見城狐見攻과 社鼠見燻하니 何則고 所託者然也라하니라 하야 以濁亂天下
요 未有能劫脅天子
하야 如制嬰兒
하고 廢置在手
하야 東西出其意
하야 使天子畏之
하야 若乘虎狼而挾蛇
를 如唐世者也
라
所以然者는 非他라 漢不握兵하고 唐握兵故也일새니라
晩節에 令高力士로 省決章奏하고 乃至進退將相에도 時與之議하야 自太子王公으로 皆畏事之하니 宦官이 自此熾矣라
及中原板蕩
注+[頭註]板蕩은 謂喪亂이라 에 肅宗
이 收兵靈武
注+[頭註]肅宗卽位於靈武는 見上하니라 할새 李輔國
이 以東宮舊隷
로 參預軍謀
하니 寵過而驕
하야 不復能制
하야 遂至愛子慈父皆不能庇
注+[頭註]輔國譖肅宗次子建寧王倓而殺之하고 又劫玄宗하야 居西內하니 肅宗畏輔國하야 不能詣西內하니라 하야 以憂
終
注+[釋義]悸는 其季反이니 心動也라 이러니
代宗踐阼
에 仍遵覆轍
하야 程元振, 魚朝恩
이 相繼用事
하야 竊弄刑賞
하고 壅蔽聰明
하야 하고 陵宰相如奴虜
라
是以
로 來
注+[頭註]山南東道節度使也라 元振有所請이로되 不從이어늘 元振이 譖殺之하니라 이 入朝
에 遇讒賜死
하고 吐蕃
이 深侵郊甸
호되 匿不以聞
하야 致狼狽幸陝
이라
李光弼
이 危疑憤鬱
하야 以隕其生
하고 郭子儀擯廢家居
하야 不保丘壟
注+[頭註]盜發子儀父塚이어늘 捕之不獲하니 魚朝恩素惡子儀하야 疑朝恩使之라 하고 僕固懷恩
이 寃抑無訴
하야 遂棄勳庸
하고 更爲叛亂
이라
德宗初立
에 頗振綱紀
하야 宦官稍絀
이러니 而返自興元
注+[頭註]漢之漢中郡也라 晉置梁州러니 德宗改爲興元府하니라 으로 猜忌諸將
하야 以李晟, 渾瑊爲不可信
이라하야 悉奪其兵
하고 而以竇文場, 霍仙鳴
으로 爲中尉
하야 使典宿衛
라 自是
로 太阿之柄
이 落其掌握矣
라
憲宗末年
에 吐突承璀欲廢嫡立庶
하야 以成陳弘志之變
注+[頭註]憲宗見弑라 하고 寶曆
注+[頭註]敬宗年號라 에 狎暱群小
하야 劉克明, 蘇佐明
이 爲逆
注+[頭註]見四十七卷하니라 이라
其後
에 絳王
注+[頭註]名悟니 憲宗子也라 宦官劉克明等이 殺敬宗하고 立絳王이러니 宦官王守澄等이 討克明殺王하고 立文宗하니라及文, 武, 宣, 懿, 僖, 昭六帝 皆爲宦官所立
하야 勢益驕橫
이라
王守澄, 仇士良, 田令孜, 楊復恭, 劉季述, 韓全誨 爲之魁傑
하야 自稱定策國老
라하고 目天子爲門生
이라하야 根深
固
하야 疾成膏
注+[釋義]膏는 心下也요 肓은 膈上也라 春秋左傳云 在肓之上, 膏之下하야 攻之不可라하니라 하야 不可救藥矣
라
文宗
이 深憤其然
하야 志欲除之
나 以宋申錫
注+[頭註]王守澄誣告하야 貶爲開州司馬라가 卒於貶所하니라 之賢
으로도 猶不能有所爲
하고 反受其殃
하니 況李訓, 鄭注
는 反覆小人
으로 欲以一朝譎詐之謀
로 翦累世膠固之黨
이라가 遂至涉血禁塗
하고 積尸省戶
하며 公卿大臣
이 連頸就誅
注+[頭註]仇士良等이 令禁兵으로 殺王涯等兩省金吾吏卒千六百餘人하고 賈餗舒元輿 皆收繫斬之하니라 하야 闔門屠滅
이라
天子陽瘖
注+[原註]瘖은 於金反이니 不能言也라 縱酒
하야 飮泣呑氣
하야 自比赧, 獻
注+[釋義]赧은 謂周赧王이요 獻은 謂漢獻帝라 하니 不亦悲乎
아
以宣宗之嚴毅明察로도 猶閉目搖首하고 自謂畏之하니 況懿, 僖之驕侈하야 苟聲色毬獵으로 足充其欲이면 則政事一以付之하고 呼之以父가 固無怪矣라
賊汚宮闕
注+[頭註]賊은 謂黃巢라 하야 兩幸梁, 益
은 皆令孜所爲也
라
昭宗이 不勝其恥하고 力欲淸滌이나 而所任이 不得其人하고 所行이 不由其道하야
始則張濬
이 覆軍於平陽
하야 增李克用跋扈之勢
하고 復恭
이 亡命於山南
하야 啓宋文通不臣之心
注+[附註]楊復恭이 摠宿衛하야 潛殺上舅王環하니 上恨之하야 出復恭爲鳳翔監軍한대 復恭慍懟하야 不肯行하고 謀反走興元하야 與山南西道節度使楊守亮으로 擧兵拒命하다 茂貞이 上言호되 守亮이 容匿反臣하니 請出兵討之하소서 朝議以爲茂貞이 得山南이면 不可復制라하야늘 下詔和解之러니 茂貞이 擅擧兵하야 擊取興元하니 守亮, 復恭等이 奔閬州하니라 茂貞이 自請鎭興元한대 以茂貞爲山南西道節度使러니 茂貞이 不奉詔어늘 遣覃王嗣周하야 討茂貞하니 茂貞拒官軍이라 於是에 茂貞이 盡有鳳翔, 興元, 洋隴等十五州之地하니라 하며 終則兵交闕庭
하고 矢及御衣
하야
漂泊莎城
注+[附註]李茂貞假子右軍指揮使李繼鵬이 作亂하야 謀劫上幸鳳翔이라 中尉劉景宣이 與王行實知之하고 欲劫上幸邠州러니 繼鵬이 以鳳翔兵으로 攻侍衛하야 矢拂御衣하니 上出宿莎城하고 幸石門鎭하니라 邠州는 王行瑜也라 하고 流寓華陰
注+[頭註]韓建이 請幸華州하니라 하며 幽辱東內
하고 劫遷岐陽
注+[頭註]岐陽은 鳳翔也라 하니 崔昌遐無如之何
注+[附註]崔胤은 字昌遐니 宋太祖諱故로 稱字라 全忠이 脅帝遷洛하고 長安居人을 悉東하니 老幼於路에 啼號不絶하고 皆大罵曰 國賊崔胤이 導全忠賣社稷하야 使我及此라하니라 하야 更召朱全忠以討之
라
連兵圍城
에 再罹寒暑
하야 御膳
이 不足於
注+[釋義]糗는 去久反이고 又丘救反이라 糒는 平秘反이니 乾糧也라 하고 王侯斃
注+[原註]踣은 蒲墨反이니 僵也요 仆也라 於飢寒
하니
然後에 全誨就誅하고 乘輿東出하야 翦滅其黨하야 靡有孑遺나 而唐之廟社 因以丘墟矣니라
然則宦者之禍 始於明皇하야 盛於肅, 代하고 成於德宗하고 極於
昭宗
이라 라하니 爲國家者 防微杜漸
을 可不愼其始哉
아
自餘傷賢害能하야 召亂致禍하며 賣官鬻獄하고 沮敗師徒하며 蠹害烝民을 不可徧擧라
夫寺人之官
注+[原註]寺는 奄官也라 은 自三王之世
로 載於詩, 禮
하니
如巷伯之疾惡
注+[釋義]巷伯은 詩篇名이라 詩曰 取彼譖人하야 投畀豺虎호리라 豺虎不食이어든 投畀有北호리라 有北不受어든 投畀有昊라하니 寺人孟子作爲此詩라 文公傳曰 巷은 是宮中道名이니 秦漢所謂永巷也요 伯은 長也니 主宮內道官之長이니 卽寺人也라 蓋以譖被宮而爲此官이니 孟子는 其字也라 投棄畀與之而不食不受는 言譖讒之人은 物所共惡니 投畀昊天하야 使制其罪니 此皆設言하야 以見欲其死亡之甚也니라 과 寺人披之事君
注+[釋義]寺人은 內小臣也니 名披니 春秋에 作勃하니라 史晉世家에 晉獻公子重耳 遭驪姬之譖하야 走保蒲한대 獻公이 命寺人披하야 伐蒲러니 重耳踰垣而走어늘 寺人披追之하야 斬其衣袪하다 後에 重耳立하니 是爲文公이라 寺人披請見이어늘 文公讓之한대 披對曰 君命無二는 古之制也라하니라과 鄭衆之辭賞
注+[釋義]漢和時에 鄭衆이 首謀誅竇憲하여 以功遷大長秋러니 策勳班賞할새 每辭多受少하니라 과 呂彊之直諫
注+[釋義]漢靈時에 呂彊이 諫止封賞하고 諫하고 諫選擧法하니라 과 曹日升之救患
注+[釋義]肅宗時에 賊圍南陽甚急이러니 曹日升이 請與十騎로 冒圍入城하야 宣慰한대 賊不敢逼하니 城中大喜하니라 과 馬存亮之弭亂
注+[釋義]敬宗初에 染署工張韶 與卜者蘇元明으로 爲變이러니 存亮이 遣神策騎兵하야 射韶及元明하야 皆死하니라 과 楊復光之討賊
注+[釋義]楊復光이 僖宗時에 帥八都將하야 以敗朱溫하니라 과 嚴遵美之避權
注+[釋義]嚴遵美는 昭宗時에 歷軍容使라 嘗嘆曰 北司供奉官은 以給事니 今執笏은 過矣라하더니 後隱靑城山하니라과 張承業之竭忠
注+[釋義]張承業은 僖宗時宦者라 後唐莊宗이 將卽位한대 承業이 諫求前唐之後立之호되 莊宗不聽이어늘 遂不食卒하니라 은 其中
에 豈無賢才乎
아
顧人主不當與之謀議政事하고 進退士大夫하야 使有威福하야 足以動人耳라
果或有罪면 小則刑之하고 大則誅之하야 無所寬赦니 如此면 雖使之專橫이나 孰敢哉아
豈可不察臧
하고 不擇是非
하고 欲草
而禽
之
注+[釋義]王氏曰 草薙禽獮은 謂翦除其根之義也라 記月令篇에 季夏에 燒薙行水하야 利以殺草라한대 註에 薙는 芟草也라하니라 獮은 殺也라 說文에 秋獵曰獮이니 應殺氣也라하니라 리오
是以로 袁紹行之於前에 而董卓弱漢하고 崔昌遐襲之於後에 而朱氏簒唐하야 雖快一時之忿이나 而國隨以亡하니
是猶惡衣之垢而焚之하고 惡木之蠹而伐之니 其爲害 豈不益多哉아
孔子曰 人而不仁을 疾之已甚이 亂也라하시니 斯之謂矣니라
然이나 當是時하야 奸臣擅權하고 藩鎭跋扈하며 而宦官이 方恃功驕恣하야 自號定策國老하고 斥天子爲門生하야 疾成膏肓하야 不可捄藥하니 可勝歎哉아
是故로 始則張濬覆軍於平陽하야 增李克用不平之志하고 中則楊復恭亡命於山南하야 啓宋文通不臣之心하고 終則兵交闕庭하야 矢及宸衣하야
漂泊莎城하고 流寓華陰하며 幽辱東內하고 劫遷岐陽하야 流離東都라
至不得已하야 遣使持密詔하야 告難於四方이로되 而不聞一人惻然赴難者라
정월에 이무정李茂貞이 홀로 상上을 뵙고는 한전회韓全誨 등을 죽이고 주전충朱全忠과 화해하고서 황제의 거가車駕를 받들어 장안長安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상上이 기뻐하여 즉시 한전회韓全誨를 체포해서 목을 베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한전회韓全誨 등의 머리를 자루에 넣어 주전충朱全忠에게 보여주었다.
이때 봉상鳳翔에서 죽은 환관이 이미 72명이었고, 주전충朱全忠이 또 은밀히 경조윤京兆尹에게 명하여 환관들을 체포해서 죽인 것이 90명이었다.
갑자일甲子日(22일)에 거가車駕가 봉상鳳翔을 나와 주전충朱全忠의 진영으로 갔다가 기사일己巳日(27일)에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다.
“국초國初에 천하가 태평할 때에는 환관宦官들이 병권을 맡고서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는데, 현종玄宗의 천보天寶 연간 이래로 환관들이 점점 강성해지고 덕종德宗의 정원貞元 말기에 우림위羽林衛를 나누어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을 만들고는 호위와 시종을 편리하게 한다 하여 이때 처음으로 환관으로 하여금 이 일을 주관하게 하여 2천 명을 정제定制로 삼았습니다.
이로부터 환관이 기밀機密의 사무事務에 참여하여 관장해서 백사百司의 권한을 빼앗고 상하上下가 서로 미봉彌縫하여 함께 불법不法을 자행하였습니다.
크게는 번진藩鎭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켜서 국가를 경복傾覆하고 위태롭게 하며, 작게는 매관매직하고 옥사를 미끼로 뇌물을 받아 조정을 좀먹고 해쳤으니, 왕실王室이 쇠약하고 혼란해진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그 근원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화가 끝내 그치지 않을 것이니, 청컨대 내시의 여러
사司를 모두 파하여 그들의 사무를 다
성사省寺로
注+[頭註]시寺는 잇는 것이니, 일을 다스리는 자가 이 가운데에서 일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다. 삼공三公이 거처하는 곳을 성省이라 하고 구경九卿이 거처하는 곳을 시寺라 한다. 돌려보내고
제도諸道의
감군監軍을 모두 불러 대궐 아래로 돌아오게 하소서.”
이날 주전충朱全忠이 군대를 이끌고 환관인 제오가범第五可範 이하 수백 명을 내시성內侍省에서 몰아내어 모두 죽이니, 원통함을 호소하는 소리가 대궐 안팎에 진동하였다.
또 환관 중에 외방外方의 사자使者로 나간 자는 황제가 소재지에 명하여 체포해서 죽이게 하고, 다만 황의黃衣(환관)로 유약한 자 30명만을 남겨두어 물 뿌리고 청소하는 일에 대비하게 하였다.
“환관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국가의 환난이 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이들은 궁중에 출입하여 군주가 어릴 때부터 장성함에 이르기까지 이들과 친압하니,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이 나아가 뵙는 것이 일정한 때가 있어서 엄격하고 공경할 만한 것과는 같지 않다.
환관 중에는 다시 재주가 영리하고
注+[釋義]현儇은 호연반呼緣反(현)이니 지혜로운 것이요, 이利는 날카로움이다.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현儇은 살피고 지혜로우며 경박한 작은 재주를 이른다.” 하였다. 언어가 민첩하여
注+[通鑑要解]급給은 민첩한 것이다. 군주의 안색을 잘 살피고 군주의
지취志趣를 받들어 영합하는 자가 있다.
그리하여 명령을 받으면 위배하거나 거스르는 근심이 없고, 일을 시키면 군주의 뜻에 맞는 효험이 있으니, 만일
상지上智의 군주가 물정을 훤히 알고 화를 염려함이 깊고 멀어서
시봉侍奉하는 일 이외에 환관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군주 곁에 가까이 있는 자는 날로 친해지고 군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는 날로 소원해져서, 환관들의
감언이설甘言利說과 겸손한 청탁을 군주가 때때로 따라주고, 서서히 젖어드는 참소와 피부로 받는
注+[附註]침윤浸潤은 물이 점점 스며드는 것처럼 점점 젖어들게 하고 갑작스럽게 하지 않는 것이요, 훼毁는 남의 행실을 헐뜯는 것이다. 부수膚受는 직접 피부로 받는 것으로 이해利害가 몸에 간절함을 이르니, 《주역周易》에 이른바 “상牀을 깎아 피부에까지 이르러서 재앙에 매우 가깝다.”는 것과 같은 것이요, 소愬는 자신의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이다. 남을 헐뜯을 적에 점점 젖어들게 하고 갑작스럽게 하지 않으면 듣는 자가 그 말에 빠져들어감을 깨닫지 못하여 깊이 믿게 하고, 억울함을 하소연할 적에 급박(절박)하여 몸에 간절하게 하면 듣는 자가 미처 상세함을 다하지 못하여 대번에 성을 내게 되니, 두 가지는 모두 살피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소연을 군주가 때때로 들어주게 된다.
이에 관리를 내치고 올려주며
注+[釋義]출黜은 관직을 낮추는 것이고, 척陟은 올리는 것이다. 형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정사가 가깝고 친숙한 환관에게 슬그머니 옮겨가되 군주가 스스로 알지 못하니, 이는 마치 독한 술을 마심에 그 맛을 좋아하여 술에 취함을 잊는 것과 같다.
관리를 내치고 올려주며 형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권한이 다른 사람의 수중으로 옮겨가고서, 국가가 위태롭고 혼란하지 않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동한東漢이 쇠망할 때에
환관宦官들이 가장 교만하고 횡포하다고 이름났다.
注+[釋義]동한지쇠東漢之衰 환관최명교횡宦官最名驕橫:[釋義]횡橫은 호맹반胡孟反(횡)이니, 이치를 따르지 않는 것을 횡橫이라 한다. [頭註]환제桓帝 때의 환관인 오후五侯는 20권卷에 보이고, 또 영제靈帝 때의 환관인 조절曹節, 후람侯覽, 왕보王甫의 무리는 21권卷에 보인다.
그러나 모두 군주의 권한을 빌려서 군주 곁에 의지하여
注+[釋義]홍용재洪容齋(洪邁)가 말하였다. “성城에 사는 여우굴에는 물을 대지 않고 사社에 사는 쥐구멍에는 불을 놓지 않으니, 깃들어 사는 곳이 의지할 곳을 얻었음을 말한 것으로, 이는 옛말이다. 그러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대체로 군주의 좌우에 있어서 군주와 가깝고 친숙한 자(환관)들을 가리켜 성城에 사는 여우와 사社에 사는 쥐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 기재된 것을 읽어보니, 맹상군孟嘗君의 문객이 말하기를 ‘여우는 사람들이 공격하는 대상이고 쥐는 사람들이 불을 놓는 대상이지만, 신臣은 성城에 사는 여우가 공격당하고 사社에 사는 쥐가 불에 타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어째서입니까? 의탁한 곳이 그렇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천하를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혔을 뿐이요, 천자를 겁박하고 위협하여 어린아이를 제재하듯이 하고 황제를 폐위하고 세움이 그들의 손에 달려 있어서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는 것이 모두 자기들 마음대로 하여 천자로 하여금 호랑이를 타고 뱀을 끼고 있는 것처럼 두려워하게 하기를
당唐나라 때와 같이 한 적은 있지 않았다.
이렇게 된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한漢나라의 환관들은 병권을 장악하지 않았고 당唐나라의 환관들은 병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태종太宗은 전대前代의 폐습을 거울로 삼고 환관을 깊이 억제하여 이들의 벼슬이 4품을 넘지 못하게 하였는데, 명황明皇(玄宗)이 비로소 옛 법을 무너뜨려 이들을 높이고 이들을 조장하였다.
말년에 환관인 고역사高力士로 하여금 장주章奏를 살펴보고 결정하게 하였으며, 마침내 장수와 재상을 올리고 물리침에 이르러서도 때로 고역사高力士와 상의하여 태자太子와 왕공王公으로부터 모두 고역사高力士를 두려워하여 섬기니, 환관의 세력이 이로부터 강성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
안사安史의
난亂으로〉中原이 어지러워 문란하게 되자,
注+[頭註]판탕板蕩은 상란喪亂함을 이른다.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여 병력을 수습할 적에
注+[頭註]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것은 상권上卷에 보인다. 환관인
이보국李輔國이
동궁東宮의 옛 관료로 군대의 계책에 참여하니, 황제의 총애가 지나쳐 교만해져서 다시는 제재하지 못하여 마침내 사랑하는 자식과 자애로운 아버지가 모두 비호받지 못하여
注+[頭註]수지애자자부개불능비遂至愛子慈父皆不能庇:이보국李輔國은 숙종肅宗의 차자次子인 건녕왕建寧王 이담李倓을 참소하여 죽이고, 또 현종玄宗을 협박하여 서내西內에 거처하게 하니, 숙종肅宗이 이보국李輔國을 두려워하여 서내西內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근심과 두려움으로 죽게 하기까지 하였다.
注+[釋義]계悸는 기계반其季反(계)이니,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대종代宗은 즉위하자 잘못된 전철을 그대로 따라서 환관인 정원진程元振과 어조은魚朝恩이 서로 이어 용사用事하여 형벌과 상을 내리는 권한을 도둑질하여 농간하고 군주의 총명을 가려서, 천자天子를 보기를 버려놓은 갖옷처럼 여기고 재상을 능멸하기를 종과 포로처럼 여겼다.
이 때문에
내진來瑱이
注+[頭註]내진來瑱은 산남동도절도사山南東道節度使이다. 정원진程元振이 요청한 것이 있었으나 내진來瑱이 따르지 않자, 정원진程元振이 그를 참소하여 죽였다. 들어와서 조회할 적에
정원진程元振의 참소를 만나 사약을 하사받았고,
토번吐蕃이
교전郊甸을 깊이 침략하였으나 환관들이 숨기고 아뢰지 않아서 황제가 낭패하고
섬주陝州로 파천하게 만들었다.
환관들 때문에
이광필李光弼은 위태롭고 의심하여 울분을 느껴서 그의 목숨을 잃었고,
곽자의郭子儀는 배척을 당하고 버려져 집에 거처하여
구롱丘壟(先塋)을 보전하지 못하였고,
注+[頭註]도적이 곽자의郭子儀 아버지의 무덤을 파헤쳤는데 범인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어조은魚朝恩이 평소 곽자의郭子儀를 미워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어조은魚朝恩이 시킨 것으로 의심하였다. 복고회은僕固懷恩은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마침내 옛 공훈을 버리고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덕종德宗은 처음 즉위하자 자못 기강을 떨쳐서 환관의 세력이 다소 꺾였는데
흥원興元에서 돌아온 뒤로
注+[頭註]흥원興元은 한漢나라 한중군漢中郡이다. 진晉나라 때 양주梁州를 설치하였는데 덕종德宗이 흥원부興元府로 개칭하였다. 여러 장수들을 시기하여
이성李晟과
혼감渾瑊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들의 병권을 다 빼앗고, 환관인
두문장竇文場과
곽선명霍仙鳴을
중위中尉로 삼아 이들로 하여금 궁중의
숙위宿衛를 맡게 하니, 이로부터 칼자루(兵權)가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었다.
헌종憲宗은 말년에 환관인
토돌승최吐突承璀가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우고자 하여
진홍지陳弘志의 변란을
注+[頭註]헌종憲宗은 진홍지陳弘志에게 시해를 당하였다. 빚어냈고,
경종敬宗은
보력寶曆 연간에
注+[頭註]보력寶曆은 경종敬宗의 연호이다. 여러 소인들을 친압하여
유극명劉克明과
소좌명蘇佐明이 반역을 하였다.
注+[頭註]유극명劉克明 소좌명蘇佐明 위역爲逆:유극명劉克明과 소좌명蘇佐明이 반역을 한 것은 47권에 보인다.
그 뒤에
강왕絳王 이오李悟와
注+[頭註]강왕絳王은 이름이 오悟이니 헌종憲宗의 아들이다. 환관 유극명劉克明 등이 경종敬宗을 시해하고 강왕絳王을 세웠는데, 환관인 왕수징王守澄 등이 유극명劉克明이 왕王을 시해한 것을 토벌하고 문종文宗을 세웠다. 문종文宗,
무종武宗,
선종宣宗,
의종懿宗,
희종僖宗,
소종昭宗의 여섯 황제가 모두 환관들에게 옹립되어서 환관의 세력이 더욱 교만해지고 전횡하였다.
왕수징王守澄, 仇士良,
전령자田令孜,
양복공楊復恭,
유계술劉季述,
한전회韓全誨가 환관의 괴수가 되어 자칭
정책국로定策國老라 하고
천자天子를 지목하여
문생門生이라 하여, 뿌리가 깊고 꼭지가 단단하여
고황膏肓의
注+[釋義]고膏는 심장 아래이고, 황肓은 명치 위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이르기를 “병이 명치 위와 심장 아래에 있어서 치료해도 낫지 않는다.” 하였다. 병이 되어서 치료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문종文宗은 이것을 깊이 분하게 여겨 마음속으로 이들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송신석宋申錫처럼
注+[頭註]송신석宋申錫은 왕수징王守澄의 무고로 개주사마開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좌천된 곳에서 죽었다. 어진 자도 오히려 제거한 바가 있지 못하고 도리어 앙화를 받았는데, 하물며
이훈李訓과
정주鄭注는 반복무상한 소인으로서 하루아침의 음모와 속임수를 가지고 여러 대에 걸쳐 아교로 풀칠해놓은 것처럼 견고한 환관의 붕당을 제거하고자 하다가 마침내 궁중의 길에 유혈이 낭자하고
대성臺省의 문 앞에 시체가 쌓이는 데에 이르렀으며,
공경公卿과
대신大臣들이 연달아 죽임을 당하여 온
注+[頭註]仇士良 등이 금병禁兵으로 하여금 왕애王涯 등 양성兩省과 금오金吾의 이졸吏卒 1600여 명을 죽이게 하였고, 가속賈餗과 서원여舒元輿는 모두 잡혀서 참수당하였다. 가문이 도륙당하고 멸망하였다.
이에 천자가 거짓으로 벙어리가 되어
注+[原註]음瘖은 어금반於金反(음)이니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술을 실컷 마시고 속으로 울면서 슬픈 기운을 삼키고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여 스스로
주周나라
난왕赧王과
한漢나라
헌제獻帝에게
注+[釋義]난赧은 주周나라 난왕赧王을 이르고, 헌獻은 한漢나라 헌제獻帝를 이른다. 비유하였으니, 참으로 슬프지 않은가.
선종宣宗의 엄하고 굳셈과 명찰함으로도 오히려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며 스스로 환관들을 두려워한다고 말하였으니, 하물며 의종懿宗과 희종僖宗이 교만하고 사치해서 만일 음악과 여색과 격구擊毬와 사냥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분히 채워주기만 하면 정사政事를 한결같이 환관들에게 맡기고 그들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는 것이다.
적(黃巢)이 궁궐을 더럽혀서
注+[頭註]적賊은 황소黃巢를 이른다. 희종僖宗이 두 번이나
양주梁州(興元)와
익주益州(成都)로 파천해 간 것은 모두 환관인
전령자田令孜의 소행이다.
소종昭宗은 이러한 치욕을 견디지 못하여 힘써 소탕하고자 하였으나 임용한 것이 적임자가 아니었고 행한 바가 그 도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장준張濬이
평양平陽에서 군대를 전복시켜
이극용李克用의
발호跋扈하는 기세를 더하였고,
양복공楊復恭이
산남山南으로 망명하여
송문통宋文通의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계도하였으며,
注+[附註]양복공楊復恭이 궁중의 숙위宿衛를 총괄하면서 상上의 외숙인 왕환王環을 은밀히 죽이니, 상上이 이것을 통한으로 여겨 양복공楊復恭을 봉상감군鳳翔監軍으로 내보냈는데, 양복공楊復恭이 성내고 원망하여 임지任地로 가려 하지 않고 모반하여 흥원興元으로 달아나서 산남서도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 양수량楊守亮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황명을 거역하였다. 이무정李茂貞이 상언上言하기를 “양수량楊守亮이 배반한 신하를 용인하여 숨겨주었으니, 군대를 출동하여 토벌하게 해주소서.”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이무정李茂貞이 산남山南을 얻으면 다시는 제재할 수 없다.” 하였으므로 조서를 내려 화해하게 하였는데, 이무정李茂貞이 멋대로 군대를 일으켜서 흥원興元을 공격하여 점령하니, 양수량楊守亮과 양복공楊復恭 등이 낭주閬州로 도망하였다. 이무정李茂貞이 흥원興元에 진주할 것을 자청하자, 상上이 이무정李茂貞을 산남서도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로 임명하였는데, 이무정李茂貞이 칙명을 받들지 않았다. 황제가 담왕覃王 이사주李嗣周를 보내어 이무정李茂貞을 토벌하게 하니, 이무정李茂貞이 관군官軍에게 항거하였다. 이에 이무정李茂貞이 봉상鳳翔, 흥원興元, 양롱洋隴 등 15주州의 영토를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종말에는 병기가 대궐 뜰에서
교전交戰하고 화살이 황제의
어의御衣에 미쳤다.
그리하여
소종昭宗이
사성莎城으로 떠돌아다니고
注+[附註]이무정李茂貞의 양자養子인 우군지휘사右軍指揮使 이계붕李繼鵬이 난을 일으켜서 상上을 위협하여 봉상鳳翔으로 갈 것을 모의하였다. 중위中尉 유경선劉景宣이 왕행실王行實과 함께 이러한 사실을 알고는 상上을 위협하여 빈주邠州로 가게 하고자 하였는데, 이계붕李繼鵬이 봉상鳳翔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시위侍衛하는 자들을 공격하여 화살이 어의御衣를 스치니, 상上이 궁궐을 나가 사성莎城에서 유숙하고 석문진石門鎭으로 갔다. 빈주절도사邠州節度使는 왕행유王行瑜이다. 화음華陰에서 이리저리 우거하였으며,
注+[頭註]한건韓建이 화주華州(華陰)로 갈 것을 청하였다. 동궁東宮에 갇혀 치욕을 당하고 협박을 받아
기양岐陽으로 옮겨가니,
注+[頭註]기양岐陽은 봉상鳳翔이다. 최창하崔昌遐(崔胤)가 어찌할 수가 없어
注+[附註]최윤崔胤은 자字가 창하昌遐이니, 송宋나라 태조太祖의 휘諱가 윤胤이기 때문에 자字를 칭한 것이다. 주전충朱全忠이 황제를 위협하여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게 하고 장안長安에 거주하는 자들을 모두 동쪽으로 옮기니, 늙은이와 어린아이가 도로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모두 크게 꾸짖기를 “국적國賊인 최윤崔胤이 주전충朱全忠을 유도하여 사직社稷을 팔아먹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 하였다. 다시
주전충朱全忠을 불러 토벌하였다.
주전충朱全忠이 군대를 연합하여
기양성岐陽城을 포위하자, 황제가 두 번이나 추위와 더위의 고통을 만나고
어선御膳은 말린 밥과 미숫가루도 부족하였으며
注+[釋義]구糗는 거구반去久反(구)이고 또 구구반丘救反(구)이다. 비糒는 평비반平秘反(비)이니 말린 양식이다. 왕후王侯가 굶주림과 추위에 쓰러져 죽었다.
注+[原註]부踣은 포묵반蒲墨反(북)이니 쓰러지고 눕는 것이다.
그런 뒤에야 한전회韓全誨가 죽임을 당하고 황제의 승여乘輿가 동쪽으로 나와 한전회韓全誨의 무리를 제거하고 멸망시켜 남김이 없게 하였으나 당唐나라의 종묘와 사직이 이로 인해 빈 터가 되었다.
그렇다면 환관의 화가 명황明皇(玄宗)에게서 시작되어 숙종肅宗과 대종代宗 때에 흥성하였으며 덕종德宗 때에 크게 이루어지고 소종昭宗 때에 지극하였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은미할 때에 막고 점점 번져나가는 것을 막기를 처음에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환관들이 초래한 화禍 가운데에 분명하게 더욱 드러난 것이다.
그 나머지 어진 사람과 재능 있는 사람을 해치고 화란禍亂을 부르며, 돈을 받고 관직을 팔고 뇌물을 받고 옥사를 그릇되게 판결하며, 군대를 패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친 것을 이루 다 들 수가 없다.
시인寺人(宦官)의 관직은
注+[原註]시寺는 환관이다.삼왕三王의 시대로부터 시작되어 《
시경詩經》과 《
예기禮記》에 기재되어 있다.
이는 규달閨闥(궁전)의 통행을 삼가고 내외內外의 말을 통하기 위한 것이니,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예컨대
주周나라
유왕幽王 때
항백巷伯이 악한 자를 미워한 것과
注+[釋義]항백巷伯은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이다. 이 시詩에 “저 참소하는 사람을 취하여 승냥이와 호랑이에게 던져 주리라. 승냥이와 호랑이가 먹지 않거든 북쪽의 불모지에 던져 주리라. 북쪽의 불모지에서 받지 않거든 하늘에 던져 주리라.”라고 하였으니, 시인寺人인 맹자孟子가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주문공朱文公(朱熹)의 《시경집전詩經集傳》에 이르기를 “항巷은 궁중宮中의 길 이름이니, 진秦‧한漢시대에 이른바 영항永巷이라는 것이요, 백伯은 우두머리이니 궁궐 안의 길을 주관하는 장관인 바, 이것이 바로 시인寺人이다. 참소로 인해 궁형宮刑을 당하고 이 관직을 맡았으니, 맹자孟子는 그의 자字이다. 던져 버리고 주어도 먹지 않고 받지 않는다는 것은, 참소하고 모함하는 사람은 만물이 함께 미워하는 바이니, 하늘에 던져 주어서 그 죄를 제재하게 함을 말한 것이다. 이는 모두 가설하여 말해서 그가 죽고 망하기를 바람이 심함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다. 진晉나라
헌공獻公 때
시인寺人인
피披가 군주를 섬긴 것과
注+[釋義]시인寺人은 궁중의 낮은 신하로 이름이 피披이니, 《춘추春秋》에 발제勃鞮로 되어 있다. 《사기史記》 〈진세가晉世家〉에 진晉 헌공獻公의 아들 중이重耳가 여희驪姬의 참소를 만나 달아나서 포蒲 땅을 지키자, 헌공獻公이 시인寺人 피披에게 명하여 포蒲 땅을 공격하게 하였다. 중이重耳가 담장을 뛰어넘어 달아나자, 시인寺人 피披가 쫓아가서 옷섶을 베었다. 뒤에 중이重耳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문공文公이다. 시인寺人 피披가 뵙기를 청하자 문공文公이 꾸짖으니, 피披가 대답하기를 “임금의 명령에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은 옛 제도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한漢나라
화제和帝 때
정중鄭衆이
상賞을 사양한 것과
注+[釋義]한漢나라 화제和帝 때에 정중鄭衆이 두헌竇憲을 죽이는 일을 주모主謀하여 그 공으로 대장추大長秋에 승진하였는데, 공훈을 기록하고 상을 줄 적에 매번 많은 것을 사양하고 적은 것을 받았다.한漢나라
영제靈帝 때에
여강呂彊이
직간直諫한 것과
注+[釋義]한漢나라 영제靈帝 때에 여강呂彊이 봉상封賞을 중지하도록 간하였고, 도행비導行費에 대해 간하고 선거법選擧法에 대해 간하였다. 당唐나라
숙종肅宗 때에
조일승曹日升이
환난患難을 구원한 것과
注+[釋義]당唐나라 숙종肅宗 때에 적賊(武令珣)이 남양南陽을 포위하여 매우 위급하였는데, 조일승曹日升이 황제에게 청하여 10명의 기병과 함께 포위를 뚫고 성 안에 들어가 선위宣慰하자 적이 감히 핍박하지 못하니, 성 안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경종敬宗 때에
마존량馬存亮이
화란禍亂을 그치게 한 것과
注+[釋義]경종敬宗 초년에 염서공染署工인 장소張韶가 점치는 자인 소원명蘇元明과 함께 변란을 일으켰는데, 마존량馬存亮이 신책군神策軍의 기병騎兵을 보내어 장소張韶와 소원명蘇元明을 활로 쏘아 모두 죽였다.희종僖宗 때에
양복광楊復光이 역적을 토벌한 것과
注+[釋義]양복광楊復光이 희종僖宗 때에 8명의 도장都將을 거느리고 주온朱溫(朱全忠)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소종昭宗 때에
엄준미嚴遵美가 권세를 사양한 것과
注+[釋義]엄준미嚴遵美는 소종昭宗 때에 군용사軍容使를 지냈다. 일찍이 탄식하기를 “북사北司의 공봉供奉하는 관원들은 고삼胯衫 차림으로 시봉해야 하니, 지금 홀笏을 잡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하였는데, 뒤에 청성산靑城山에 은둔하였다.희종僖宗 때에
장승업張承業이 충성을 다한 것과
注+[釋義]장승업張承業은 희종僖宗 때의 환관이다.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이 장차 즉위하려 하자 장승업張承業이 예전 당唐나라의 후손을 찾아 세울 것을 간하였는데, 장종莊宗이 듣지 않자 마침내 밥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같은 것은 그들 가운데 어찌 어질고 재주 있는 자가 없겠는가.
다만 군주가 마땅히 이들과 정사를 모의하고 사대부를 올리고 물리치지 않게 해서 이들로 하여금 위엄과 복을 소유하여 충분히 사람들을 놀라지 않게 해야 할 뿐이다.
그리고 과연 환관이 죄가 있을 경우 죄가 작으면 형벌을 내리고 죄가 크면 죽여서 너그럽게 사면하는 바가 없어야 하니, 이와 같이 한다면 비록 이들로 하여금 전횡專橫하게 하더라도 누가 감히 하겠는가.
어찌 착하고 착하지 않음을 살피지 않으며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서 풀을 베는 것처럼 제거하고 짐승을 죽이는 것처럼 죽이고자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풀을 베는 것처럼 제거하고 짐승을 죽이는 것처럼 죽인다는 것은 그 뿌리를 잘라 제거하는 뜻을 이른다. 《예기禮記》 〈월령편月令篇〉에 ‘계하季夏에 말린 풀을 태워 물을 흘러가게 해서 풀을 썩혀 죽이는 데 이롭다.’라고 하였는데, 주註에 ‘체薙는 풀을 베는 것이다.’ 하였다. 선獮은 죽이는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가을사냥을 선獮이라 하니, 가을의 숙살肅殺하는 기운에 응하는 것이다.’ 하였다.” 한단 말인가.
이 때문에 원소袁紹가 앞에서 행함에 동탁董卓이 반란하여 한漢나라를 약하게 만들었고, 최창하崔昌遐가 뒤에서 인습함에 주씨朱氏(朱全忠)가 당나라를 찬탈하여, 비록 한때의 분함을 상쾌하게 하였으나 나라가 뒤따라 멸망하였다.
이는 옷의 때를 싫어하여 옷을 불태우고 나무의 좀벌레를 싫어하여 나무를 베는 것과 같으니, 그 폐해가 어찌 더욱 많지 않겠는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이 인仁하지 못함을 미워하기를 너무 심하게 하는 것이 난을 불러일으킨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말씀한 것이다.”
“소종昭宗은 천자天姿가 총명하고 준걸스러워서 전대前代의 공렬功烈을 회복하려는 뜻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 간신奸臣이 권력을 독단하고 번진藩鎭이 발호跋扈하였으며, 환관宦官이 공功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스스로 정책국로定策國老라 칭하고 천자天子를 지목하여 문생門生이라 칭하여, 고황膏肓의 병病이 되어서 구원하고 치료할 수가 없었으니, 한탄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처음에는 장준張濬이 평양平陽에서 군대를 전복시켜 이극용李克用의 불평하는 마음을 더하였고, 중간에는 양복공楊復恭이 산남山南으로 망명亡命하여 송문통宋文通의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계도하였고, 종말에는 대궐 뜰에서 병란이 일어나 화살이 황제의 옷에까지 미쳤다.
그리하여 사성莎城에서 떠돌아다니고 화음華陰에서 이리저리 우거하였으며 동궁東宮에 유폐되어 곤욕을 당하고 협박에 의해 기양岐陽으로 옮겨가서 동도東都를 유리하였다.
심지어 부득이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어 밀조密詔를 가지고 가서 사방四方에 난難을 고하였으나, 한 사람도 측은히 여겨 국난國難에 달려온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사세事勢가 이 지경에 이르러 기와장이 깨지듯 흙이 무너지듯 나라가 망하였으니, 아!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