契丹之先
이 自唐昭宗天復元年
으로 契丹痕德菫可汗
이 以耶律阿保機
로 爲夷離菫
注+[釋義]掌部族軍民之政하니 猶中國使相也라하다
魏靑龍中에 幽州刺史王雄이 殺其酋比能하니 衆이 散徙潢水러니 至酋莫那하야 遷于遼西하고 九傳而爲慕容(晃)[皝]所破하야 分其衆爲三하니 曰宇文과 曰庫莫奚와 曰契丹이라
元魏初에 衆이 稍滋蔓이요 而契丹酋奇首 居潢河, 土河之間하야 有子八人하니 各自爲部러라
高句麗柔然이 謀擊之한대 大酋莫弗賀勿于懼하야 率部落三千乘하고 請附于魏하고 因居白狼水東하다
貞觀中에 太宗伐高麗할새 首領窟哥來朝어늘 詔分其地하야 爲十州하고 以其部長으로 爲刺史하고 拜窟哥하야 爲松漠都督하고 賜姓李氏하야 統領其衆하다
窟哥死에 其孫盡忠이 叛이어늘 武后遣師二十萬하야 連年乃克하니 餘衆이 附于突厥하다
開元中에 盡忠從弟失活이 請降이어늘 詔復以爲都督하다
失活이 傳沙固러니 沙固爲衙官可突干所殺하고 弟鬱于嗣하다
鬱于死에 弟咄于嗣한대 可突干이 復逐之어늘 部人이 共立咄于之弟邵固러니 可突干이 殺邵固而立屈列하야 以附于突厥하다
幽州刺史張守珪 討殺可突干이어늘 詔封其別部長過折하야 爲北平王하야 以統大賀氏諸部하다
可突干之黨雅里 殺過折하고 而立迪輦組里하야 爲阻午可汗하고 改號遙輦氏하고 雅里自爲迭剌部하야 輔阻午以爲政할새 始立制度하야 設官分地하고 刻木爲契하고 穴地爲牢焉하니라
居潢河濱하야 號審吉氏러니 及易氏迭剌하야 因譯其始興之地世里하야 爲耶律而姓之하다
天寶四年에 詔賜阻午姓名하야 曰李懷秀라하야 仍爲松漠都督이러니 懷秀尋叛이어늘 詔更封別部長楷落하야 爲恭仁王하야 以代懷秀하니 楷落이 自稱契丹王하다
會에 安祿山反하야 朝貢阻絶하니 其世次를 莫得而詳이러라
或言 其國凡八部에 常推其一部大人하야 建旗鼓하고 以主號令이라
然이나 其所稱耶瀾可汗과 屈戍巴剌可汗, 習爾之類는 不知何部大人也라
是年에 習爾死어늘 其族人欽德이 立하니 是爲痕德菫可汗이라
痕德菫之世에 諸部多微로되 而迭剌部自雅里以後로 世爲遙輦氏하고 夷離菫이 掌其國政하다
毗牒이 生頦領하고 頦領이 生耨里思하니 大度寡欲하고 令嚴衆附하야 部益盛强이러라
耨里思生薩剌德하고 薩剌德이 生勻德實하니 敎民稼穡하고 善畜牧하야 部以殷富하니라
勻德實
이 生撒剌的
하니 始敎民鼓鑄
하고 其弟述瀾
이 又善用兵
하니 于厥, 室韋, 奚,
이 畏服之
하니라
小字啜里只니 生而英異하야 初爲撻馬狨沙里하니 猶中國扈從官也라
立功
하니 國人服之
하야 號爲阿主沙里
러니 至是
에 授大迭烈府夷離菫
하야 得專用兵
하니 遂大破室韋, 于{及}厥, 奚
注+[通鑑要解]皆契丹之國名이라 諸國
하니라
十月
에 契丹
이 以阿保機爲于越
注+[原註]于越은 契丹至貴之職이니 非有大功德者면 不授라 阿保機乃廣龍化州之東城하고 建東樓以紀功하니라 하야 總知國事
하고 遂作東樓于龍化州
하다
秋八月에 晉王李克用이 遣使如契丹한대 九月에 契丹阿保機 以騎兵七萬으로 會晉王于雲中하야 約爲兄弟하고 宴甚驩이어늘
克用이 因與會師하야 進擊劉仁恭하야 拔數州하고 盡徙其民하고 復期共擊朱全忠하니 阿保機許之하다
或勸克用하야 乘間拘阿保機于會어늘 克用이 不許曰 讐敵을 未滅이어늘 而失信夷狄은 自亡之道也니라
阿保機旣去에 聞之하고 乃背盟하고 更附朱全忠하니 克用이 由是怨之하니라
十一月
에 契丹阿保機 侵奚, 霫
注+[原註]下音은 習이라 國名이니 中京地也라 하니 女眞諸部降之
하다
春正月에 其衆이 請阿保機爲可汗이어늘 阿保機乃命設壇告天하고 卽皇帝位하니 北宰相蕭轄剌과 南宰相耶律歐里思 率其下하고 上尊號曰天皇帝라하고 后述律氏曰地皇后라하다
阿保機更名億
하고 以曷魯總軍事
하고 是爲元年
注+[原註]是年은 爲梁太祖開平元年하니라 하니라
丙子
에 改元神冊
하고 大赦
하며 立子倍
注+[原註]倍는 小字突欲이라 하야 爲太子
하다
丙戌에 改元天顯하고 滅渤海하야 改爲東丹國하야 以子倍爲人皇王이라하야 居之하다
七月에 契丹主億이 卒于扶餘어늘 廟號太祖라하고 諡曰大聖神烈天皇帝라하다
東征西討
에 如折枯
朽
하야 東自海
로 西至于流沙
하고 北絶大漠
하야 信(伸)威萬里
하고 歷年二百
하니 豈一日之故哉
아
周公誅管蔡
에 人未有能非之者
어늘 剌葛安端之亂
에 遼祖旣貸其死而復用之
하니 非人君之度乎
注+[原註]辛未五年에 契丹主弟剌葛等이 謀亂이어늘 盟而釋之하고 壬申六年에 剌葛等이 復謀亂이어늘 釋之하고 不治하고 癸酉에 剌葛等이 反이어늘 誅其黨而釋之하니라 아
거란契丹의 선조는
당唐나라
소종昭宗 천복天復 원년元年으로부터
거란契丹의
흔덕근가한痕德菫可汗이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를
이리근夷離菫으로 임명하였다.
注+[釋義]이리근夷離菫은 부족部族의 군사와 백성의 정사政事를 관장하였으니, 중국中國의 사상使相과 같다.
처음에 염제炎帝의 후손으로 갈오토葛烏兎가 있었다.
이들은 대대로 삭막朔漠 지방에 웅거하니, 동호東胡라 칭하였다.
흉노匈奴의 묵특선우冒頓單于가 습격하여 격파하니, 남은 무리가 선비산鮮卑山을 확보하였다.
위魏나라 청룡靑龍 연간에 유주자사幽州刺史 왕웅王雄이 그의 추장인 비능比能을 죽이니 무리들이 황수潢水로 옮겨갔는데, 추장 막나莫那에 이르러 요서遼西로 옮겨갔고, 아홉 번 전하여 모용황慕容皝에게 격파당하여 그 무리가 셋으로 나누어지니, 우문宇文과 고막해庫莫奚와 거란契丹이었다.
원위元魏 초기에 무리들이 차츰 불어났고, 거란契丹의 추장인 기수奇首가 황하潢河와 토하土河의 사이에 거주하여 8명의 아들을 두니, 각자 부部가 되었다.
고구려高句麗 유연柔然이 이들을 공격할 것을 도모하자, 대추大酋인 막불하물우莫弗賀勿于가 두려워하여 부락部落 3천 승乘을 거느리고 위魏나라에 귀부歸附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백랑수白狼水 동쪽에 거주하였다.
당唐나라 초기에 대하씨大賀氏라 칭하는 대추大酋가 정예병 8만을 보유하였다.
정관貞觀 연간에 태종太宗이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할 적에 수령首領인 굴가窟哥가 조회하러 오자, 황제가 명하여 그 땅을 나누어 10주州를 만들고 그 부장部長을 자사刺史로 임명하였으며 굴가窟哥를 송막도독松漠都督으로 임명하고 이씨李氏 성姓을 하사하여 그 무리를 거느리게 하였다.
굴가窟哥가 죽자 그의 손자인 이진충李盡忠이 배반하였으므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20만 대군을 보내어 여러 해를 이어 공격해서 마침내 이기니, 남은 무리가 돌궐突厥에게 붙었다.
개원開元 연간에 이진충李盡忠의 종제從弟인 실활失活이 항복을 청해오자, 황제가 명하여 다시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실활失活이 사고沙固에게 전하였는데 사고沙固가 아관衙官인 가돌간可突干에게 살해당하고 아우 울우鬱于가 뒤를 이었다.
울우鬱于가 죽자 아우 돌우咄于가 뒤를 이었는데 가돌간可突干이 다시 축출하니, 부족部族 사람들이 함께 돌우咄于의 아우 소고邵固를 세웠으나 가돌간可突干이 소고邵固를 죽이고 굴렬屈列을 세워서 돌궐突厥에게 붙었다.
유주자사幽州刺史 장수규張守珪가 가돌간可突干을 토벌하여 죽이자 황제가 명하여 그 별부장別部長인 과절過折을 북평왕北平王으로 봉하여 대하씨大賀氏의 여러 부족部族을 통솔하게 하였다.
가돌간可突干의 당黨인 아리雅里가 과절過折을 죽이고 적련조리迪輦組里를 세워 조오가한阻午可汗이라 칭하고 호號를 요련씨遙輦氏라 고쳤으며, 아리雅里가 스스로 질랄부迭剌部가 되어서 조오가한阻午可汗을 보필하여 정사를 할 적에 처음으로 제도를 확립하여 관원을 설치하고 땅을 나누었으며, 나무를 새겨 문서를 만들고 땅을 파서 움을 만들었다.
황하潢河 가에 거주하여 심길씨審吉氏라 호칭하였는데 질랄迭剌로 씨氏를 바꾸고는 처음 일어난 지역인 세리世里를 번역하여 야율耶律이라 하고 성姓으로 삼았다.
천보天寶 4년에 황제가 명하여 조오가한阻午可汗에게 성명姓名을 하사해서 이회수李懷秀라 하고 인하여 송막도독松漠都督으로 임명하였는데, 이회수李懷秀가 얼마 후 배반하였으므로 황제가 명하여 다시 별도의 부족장部族長인 해락楷落을 공인왕恭仁王으로 봉하여 이회수李懷秀를 대신하게 하니, 해락楷落이 스스로 계단왕契丹王이라 칭하였다.
마침 안녹산安祿山이 배반하여 조공朝貢하는 길이 끊기니, 그 세차世次를 자세히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들 나라는 여덟 부족에 항상 한 부족의 대인大人을 추대하여 깃발과 북을 세우고 호령號令을 주관하게 한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칭한 야란가한耶瀾可汗과 굴수파랄가한屈戍巴剌可汗과 습이習爾 따위는 어떤 부족의 대인大人인지 알지 못한다.
이해에 습이習爾가 죽자 그 집안사람인 흠덕欽德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흔덕근가한痕德菫可汗이다.
흔덕근가한痕德菫可汗의 세대에는 여러 부족들이 대부분 미약하였으나 질랄부迭剌部는 아리雅里 이후로부터 대대로 요련씨遙輦氏가 되고 이리근夷離菫이 국정國政을 맡았다.
비첩毗牒이 해령頦領을 낳고 해령頦領이 누리사耨里思를 낳으니, 도량이 크고 욕심이 적으며 명령이 엄격하고 무리들이 따라서 부部가 더욱 강성해졌다.
누리사耨里思가 살랄덕薩剌德을 낳고 살랄덕薩剌德이 윤덕실勻德實을 낳으니,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목축을 잘하여 부족이 번성하고 부강하였다.
윤덕실勻德實이 살랄적撒剌的을 낳으니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북을 만들고 쇠를 주조하는 것을 가르쳤고, 그 아우 술란述瀾이 또 용병用兵을 잘하니 우궐于厥‧실위室韋‧해奚‧습霫이 두려워하여 복종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성읍城邑과 집을 만들어 거주하였고, 뽕나무와 삼을 심고 가꾸어 직물을 직조하였다.
어렸을 때 자字가 철리지啜里只이니,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여 처음에 달마융사리撻馬狨沙里가 되었으니, 이는 중국中國의 호종관扈從官과 같은 것이다.
여러 차례 공을 세우니,
국인國人들이 복종하여
아주사리阿主沙里라고 호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질렬부大迭烈府 이리근夷離菫에 제수되어 마음대로 군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마침내
실위室韋‧
우궐于厥‧
해奚注+[通鑑要解]실위室韋, 우于{及}厥于{及}厥, 해奚:실위室韋, 우궐于厥, 해奚는 모두 거란契丹의 나라 이름이다. 등 여러 나라를 대파하였다.
아보기阿保機가 하동河東을 침략하여 아홉 개의 군郡을 함락시켰다.
10월에
거란契丹이
아보기阿保機를
우월于越로 임명하여
注+[原註]우월于越은 거란契丹의 지극히 귀한 관직이니, 큰 공과 덕이 있는 자가 아니면 제수하지 않는다. 아보기阿保機가 마침내 용화주龍化州의 동성東城까지 넓히고 동쪽 누대를 세워 공을 기록하였다. 국사를 모두 관장하게 하고 마침내
용화주龍化州에 동쪽 누대를 지었다.
가을 8월에 진왕晉王 이극용李克用이 거란契丹으로 사자使者를 보내자, 9월에 거란契丹의 아보기阿保機가 기병 7만 명을 거느리고 진왕晉王과 운중雲中에서 회합하여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고 잔치를 열어 매우 즐거워하였다.
이극용李克用이 인하여 함께 군대를 모아 전진해서 유인공劉仁恭을 공격하여 여러 주를 함락시키고 그 백성들을 다 옮기고는 다시 주전충朱全忠을 함께 공격하기로 약속하니, 아보기阿保機가 이를 허락하였다.
혹자가 이극용李克用에게 이 틈을 타서 아보기阿保機를 회맹하는 장소에서 구류할 것을 권유하자, 이극용李克用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원수와 적을 아직 없애지 못했는데, 이적夷狄에게 신의를 잃는 것은 스스로 멸망하는 길이다.” 하였다.
아보기阿保機가 떠나간 뒤에 이 말을 듣고는 마침내 맹약을 저버리고 다시 주전충朱全忠에게 붙으니, 이극용李克用이 이로 말미암아 아보기阿保機를 원망하였다.
봄 2월에 주전충朱全忠이 거란契丹에 사자使者를 보내었다.
11월에
거란契丹의
아보기阿保機가
해奚와
습霫을 침략하니,
注+[原註]아래 글자(霫)의 음은 습習이다. 나라 이름이니, 중경中京 지방이다. 여진女眞의 여러 부족이 항복하였다.
12월에 거란契丹의 흔덕근가한痕德菫可汗 흠덕欽德이 죽었다.
봄 정월에 그 무리들이 아보기阿保機에게 가한可汗이 될 것을 청하자, 아보기阿保機가 마침내 명령하여 단壇을 만들고 하늘에 고유한 다음 황제에 즉위하니, 북재상北宰相인 소할랄蕭轄剌과 남재상南宰相인 야율구리사耶律歐里思가 부하들을 인솔하고 천황제天皇帝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후后인 술률씨述律氏를 지황후地皇后라 하였다.
아보기阿保機가 이름을
억億으로 고치고
갈로曷魯에게
군사軍事를 총괄하게 하고는 이 해를 원년이라 하였다.
注+[原註]이해는 양梁나라 태조太祖 개평開平 원년元年이다.
병자년丙子年(916)에
신책神冊으로
개원改元하고 크게 사면령을 내렸으며, 아들
배倍를 세워
注+[原註]배倍는 어렸을 때 자字가 돌욕突欲이다. 태자로 삼았다.
병술년丙戌年(926)에 천현天顯으로 개원改元하고 발해渤海를 멸망시켜 동단국東丹國으로 고친 다음 아들 배倍를 인황왕人皇王이라 하여 여기에 거주하게 하였다.
7월에 거란주契丹主 억億이 부여扶餘에서 죽자,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를 대성신열천황제大聖神烈天皇帝라 하였다.
“요遼나라 태조太祖는 처음 건국하고 재위한 햇수가 20년이었다.
동쪽으로 정벌하고 서쪽으로 토벌함에 마른 나뭇가지를 꺾고 썩은 가지를 꺾듯이 수월하게 취하여, 동쪽으로는 동해東海로부터 서쪽으로는 유사流沙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대막大漠을 넘어가서 만리에 위엄을 떨치고 역년이 200년이었으니, 어찌 하루 동안에 이룩한 연고이겠는가.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죽임에 사람들 중에 이것을 비난할 수 있는 자가 있지 않았는데,
날갈안단剌葛安端의 반란에
요遼나라
태조太祖는 이미 그의 사형을 사면하고 다시 등용하였으니, 임금의 도량이 아니겠는가.”
注+[原註]주공주관채周公誅管蔡……非人君之度乎:요遼나라 태조太祖 신미辛未 5년(911)에 거란주契丹主의 아우인 날갈剌葛 등이 반란을 도모하였는데 거란주契丹主는 맹약하고 풀어주었으며, 임신壬申 6년(912)에 날갈剌葛 등이 다시 반란을 도모하였는데 풀어주고 죄를 다스리지 않았으며, 계유년癸酉年(913)에 날갈剌葛 등이 배반하였는데 그 당黨만 죽이고 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