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卯]唐天祐四年이라 〈四月以後는 梁太祖皇帝朱晃開平元年이요 西川稱唐天復七年하니라
梁, 晉, 岐, 淮南, 西川凡五國이요 吳越, 湖南, 荊南, 福建, 嶺南凡五鎭이라〉
春三月
에 唐昭宣帝降御札
하야 禪位于梁
한대 梁王
이 名晃
注+[釋義]更은 平聲이요 晃은 胡廣反이라 하고 卽皇帝位
하야 國號
를 梁
이라하고 奉帝爲濟陰王
注+[頭註]遷于曹州하야 圍之以棘하고 使甲士守之下라가 戊戌年에 弑之하다하다
○ 是時
에 惟河東, 鳳翔, 淮南
注+[頭註]河東은 李克用이요 鳳翔은 李茂貞이요 淮南은 王偓이라이 稱天祐
하고 西川
注+[頭註]王建이라 이 稱天復
注+[通鑑要解]天祐, 天復은 竝昭宗年號니 先天復이요 後天祐라 하니라 年號
하고 餘皆禀梁正朔
하야 稱臣奉貢이러라
○ 蜀王이 遺晉王書云 請各帝一方하야 俟朱溫旣平하야 乃訪唐宗室立之하고 退歸藩服이어늘 晉王이 復書不許曰 誓於此生에 靡敢失節호리라
〈李克用이 平黃巢하야 有大功하니 唐昭宗이 封爲晉王이라
後에 其子存勖이 襲位하야 遂滅梁國하고 號唐하니 卽莊宗也라
蜀王은 王建이니 唐昭宗이 封爲蜀王이러니 後爲唐莊宗所滅하고 孟知祥이 復據其地라가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 岐王이 治軍甚寬하고 待士卒簡易하니 由是로 衆心悅服이라 然이나 御軍無紀律이러라
〈岐王李茂貞이 據鳳翔하니 本姓은 宋이요 名은 文通이라
僖宗時에 以功賜姓名하고 昭宗時에 封岐王하고 唐莊宗이 改封秦王이러니 至唐明宗時하야 國除하니라〉
〈馬殷이 據潭州하야 盡有湖南之地러니 至後周太祖朝하야 爲南唐所滅하니라〉
〈據廣州하야 盡有嶺表之地하고 後改號漢이러니 至宋朝하야 國除하니라〉
〈黃巢亂에 審知據福州하야 盡有閩嶺五州하고 後에 王延政이 居建州하야 號殷이러니 晉齊王時에 南唐滅之하니라〉
○ 九月에 蜀王이 卽皇帝位하야 國號를 大蜀이라하다
○ 梁遣保平節度使康懷貞하야 將兵八萬하고 攻潞州하니 晉昭義節度使李嗣昭 閉城拒守어늘 懷貞이 晝夜攻之호되 半月不拔이라
乃於潞州城下
에 更築重城
하야 內以防奔突
하고 外以拒援兵
하고 謂之夾
塹
注+[頭註]寨는 本作하니 木柵也라 塹은 坑也니 遶城水라 而守之
하다
정묘(907) 당唐나라 천우天祐 4년 - 4월 이후는 양梁나라 태조황제太祖皇帝 주황朱晃의 개평開平 원년元年이고, 서천西川은 당唐나라 천복天復 7년을 칭하였다.
양梁‧진晉‧기岐‧회남淮南‧서천西川 등 모두 다섯 나라이고, 오월吳越‧호남湖南‧형남荊南‧복건福建‧영남嶺南 등 모두 다섯 진鎭이다. -
봄 3월에
당唐나라
소선제昭宣帝가
어찰御札을 내려
양梁나라에 황제의 지위를
선양禪讓하자,
양왕梁王이 이름을
황晃으로 고치고
注+[釋義]경更은 평성平聲(고침)이고, 황晃은 호광반胡廣反(황)이다.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양梁이라 하고
소선제昭宣帝를 받들어
제음왕濟陰王으로 삼았다.
注+[頭註]소선제昭宣帝를 조주曹州로 옮겨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갑사甲士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다가 무술년戊戌年(938)에 시해하였다.
이때에 오직
하동河東,
봉상鳳翔,
회남淮南만이
注+[頭註]하동河東, 봉상鳳翔, 회남淮南:하동河東은 이극용李克用이고, 봉상鳳翔은 이무정李茂貞이고, 회남淮南은 왕악王偓이다. 천우天祐의 연호를 칭하였고
서천西川은
注+[頭註]서천西川은 왕건王建이다. 천복天復의 연호를 칭하였으며,
注+[通鑑要解]천우天祐와 천복天復은 모두 소종昭宗의 연호이니, 천복天復이 먼저이고 천우天祐가 뒤이다. 소선제昭宣帝는 연호年號가 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양梁나라의
정삭正朔을 받아서 신하를 칭하고 공물을 바쳤다.
촉왕蜀王(王建)이 진왕晉王(李克用)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청컨대 각각 한 지방의 황제가 되어 주온朱溫을 평정하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당唐나라의 종실을 찾아 세우고 물러나 번신藩臣으로 돌아가자.” 하니, 진왕晉王이 답서에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맹세코 이생에서는 감히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겠다.” 하였다.
- 이극용李克用이 황소黃巢를 평정하여 큰 공이 있으니, 당唐나라 소종昭宗이 진왕晉王으로 봉하였다.
뒤에 그의 아들 존욱存勖이 왕위를 세습하여 마침내 양梁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國號를 당唐(後唐)이라고 하니, 바로 장종莊宗이다.
촉왕蜀王은 왕건王建이니, 당唐나라 소종昭宗이 촉왕蜀王으로 봉하였는데 뒤에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에게 멸망당하였으며, 맹지상孟知祥이 다시 이 땅을 점거했다가 송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기왕岐王(李茂貞)이 군대를 다스리기를 매우 너그럽게 하고 사졸들을 대하기를 소탈하고 평이하게 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기뻐하고 복종하였으나 군대를 통솔함에 기율紀律이 없었다.
당唐나라가 망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군대가 지치고 영토가 좁다 하여 감히 황제를 칭하지 못하였다.
- 기왕岐王 이무정李茂貞이 봉상鳳翔을 점거하니, 본성本姓은 송宋이고 이름은 문통文通이다.
희종僖宗 때에 공을 세워 이무정李茂貞이라는 성명을 하사받았고, 소종昭宗 때에 기왕岐王에 봉해졌으며,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이 진왕秦王으로 고쳐서 봉하였는데, 후당後唐 명종明宗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양梁나라가 무안절도사武安節度使 마은馬殷을 초왕楚王으로 삼았다.
- 마은馬殷이 담주潭州를 점거하여 호남湖南 지역을 모두 소유하였는데, 후주後周 태조太祖 때에 이르러 남당南唐에게 멸망당하였다. -
- 전류錢鏐가 항주杭州를 점거하였는데, 송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청해절도사淸海節度使 유은劉隱을 남해왕南海王으로 삼았다.
- 유은劉隱이 광주廣州를 점거하여 영표嶺表(嶺外) 지역을 모두 소유하고 뒤에 국호國號를 한漢이라고 고쳤는데, 송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위무절도사威武節度使 왕심지王審知를 민왕閩王으로 삼았다.
- 황소黃巢의 난리에 왕심지王審知가 복주福州를 점거하여 민중閩中과 영남嶺南의 다섯 주州를 모두 소유하였고, 뒤에 왕연정王延政이 건주建州에 있으면서 은殷이라고 이름하였는데, 후진後晉의 제왕齊王 때에 남당南唐이 멸망시켰다. -
권지형남유후權知荊南留後 고계창高季昌을 절도사節度使로 삼았다.
- 고계창高季昌이 강릉江陵을 점거하였는데, 송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
9월에 촉왕蜀王(王建)이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촉大蜀이라 하였다.
양梁나라가 보평절도사保平節度使 강회정康懷貞을 보내어 8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노주潞州를 공격하게 하니, 진晉나라 소의절도사昭義節度使 이사소李嗣昭가 성문을 닫고 항거하며 지켰는데, 강회정康懷貞이 밤낮으로 공격하였으나 보름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하였다.
이에
노주성潞州城 아래에 다시 겹성[重城]을 쌓아 안으로는 적이 달려와 충돌하는 것을 막고 밖으로는 구원병이 오는 것을 막고서 이것을
협채참夾寨塹이라 이르며
注+[頭註]채寨는 본래 채砦로 쓰니, 목책이다. 참塹(참호)은 구덩이이니, 성 주위를 둘러싼 물이다.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