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申]〈晉, 岐, 吳는 稱唐天祐九年하고 梁乾化二年이라
梁主疾增甚
이어늘 謂近臣曰 我經營天下三十年
에 不意太原餘孽
注+[頭註]目晉王也라 이 更昌熾如此
하니 吾觀其志不小
라
天復奪我年
하니 我死
면 諸兒
는 非彼敵也
니 吾無葬地矣라하고 因
하야絶而復蘇하니라
○ 梁高季昌
注+[頭註]荊南節度使라 梁錫爵渤海王이러니 後改名季興하니라 唐莊宗이 封南平王이러니 傳五世하야 至宋國除하니라 이 潛有據荊南之志
하야 乃奏築江陵外郭
하야 增廣之
하다
○ 梁郢王友珪
注+[頭註]梁太祖次子이니 其母는 亳州營娼也라 하니라 의 僕夫馮廷諤
이 弑梁主
어늘 友珪卽帝位
하다
朱溫이 爲黃巢賊黨이라가 力屈來降이어늘 王鐸이 推獎過分하야 旣受同華節鎭하고 不因立功이어늘 朝廷이 又與宣武等重鎭하야
寵過而驕하야 志欲無厭하야 遂移唐祚하니 考其所爲컨대 直巨盜耳라
簒國之後
에 刑虐不悛
하고 戕害無辜
하며 不念
之恥
하야
釀成友珪之禍하야 未及七年에 其子屠之를 如机上肉이라
回視前日 弑逼之慘컨대 天之報之 足稱其施하니 可畏也夫인저
임신(912) - 진晉‧기岐‧오吳는 당唐나라 천우天祐 9년을 칭하였고, 양梁나라는 건화乾化 2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진鎭이다. -
양주梁主가 병이 더욱 심해지자, 가까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하를 경영한 지 30년인데,
태원太原의 남은 잔당(李存勖)이
注+[頭註]여얼餘孽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진왕晉王(李存勖)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다시 치성할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 내가 살펴보건대 그들의 뜻이 작지 않다.
하늘이 다시 나의 수명을 빼앗아 가니, 내가 죽으면 여러 자식들은 저들의 적수가 못 되니, 내가 장사 지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목이 메어 오열하고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양梁나라
고계창高季昌이
注+[頭註]고계창高季昌은 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이다. 양梁나라에서 작위를 내려 발해왕渤海王으로 삼았는데, 뒤에 계흥季興으로 개명하였다. 당唐나라 장종莊宗(李存勖)이 남평왕南平王에 봉하였는데, 5대代를 전하여 송宋나라 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졌다. 은밀히
형남荊南을 점거할 뜻을 품고서 마침내
강릉江陵의
외성外城을 수축할 것을
상주上奏하여 더 넓혔다.
양梁나라
영왕郢王 주우규朱友珪의
注+[頭註]영왕郢王 주우규朱友珪는 양梁나라 태조太祖의 차자次子이니, 그의 어머니는 박주영亳州營의 창기娼妓였다. 양주梁主가 양자養子인 주우문朱友文의 처妻를 사랑하여 장차 주우문朱友文을 후사로 세우려고 하다가 마침내 주우규朱友珪에게 시해당하였다. 마부인
풍정악馮廷諤이
양주梁主를 시해하자,
주우규朱友珪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주온朱溫이 황소黃巢의 적당賊黨이 되었다가 힘이 꿇리자 와서 항복하였는데, 왕탁王鐸이 분에 넘치게 추대하고 장려하여 이미 동화同華의 절진節鎭(節度使의 번진藩鎭)을 받았고, 공功을 세우지 않았는데도 조정에서 또다시 선무宣武 등의 중요한 번진藩鎭을 주었다.
그리하여 은총이 지나쳐 교만해져서 뜻과 욕망이 끝이 없어 마침내 당唐나라의 국운國運을 옮겨갔으니, 그의 소행을 살펴보면 다만 큰 도둑일 뿐이다.
주온朱溫은 나라를 찬탈한 뒤에 가혹하게 형벌하는 것을 고치지 않고 무고無辜한 사람을 살해하였으며, 부자간에 한 여자를 함께 소유하여 인륜을 어지럽히는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우규朱友珪의 화禍를 빚어 7년도 못 되어 자식이 아비를 도살하기를 도마 위의 고기를 난도질하듯 하였다.
전일前日에 군주를 시해하고 핍박한 참혹한 죄를 돌아보건대 하늘의 응보應報가 그가 한 짓에 걸맞으니, 참으로 두려워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