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癸酉]〈晉, 岐, 吳는 稱唐天祐十年하고 梁主瑱乾化三年이라
梁趙巖
注+[頭註]駙馬都尉이니 尙太祖女長樂公主하니라 이 奉使至大梁
이어늘 均王友貞
이 密與之謀誅友珪
할새
巖曰 此事成敗
는 在招討楊令公
注+[頭註]師厚爲北面道招討使하야 軍於魏州하니라 耳
니 得其一言
하야 諭禁軍
이면 吾事立辦이라한대
均王이 乃遣腹心馬愼交하야 之魏州하야 說楊師厚曰 郢王簒弑에 人望이 屬在大梁하니 公若因而成之하면 此不世之功也니라
師厚乃遣其將王舜賢
하야 至洛陽
하야 陰與袁象先
注+[頭註]親軍都指揮使니 乃太祖之甥也라 其父敬初는 尙太祖妹萬安大長公主하니라 謀
하다
庚寅旦
에 袁象先
이 帥禁兵數千人
하고 突入宮中
하니 友珪聞變
하고 與妻張氏
와 及馮廷諤
으로 趨北垣樓下
하야 將踰城
이러니 自不免하고 令廷諤先殺妻
하고 次殺己
하니 廷諤亦自殺
이라
象先, 巖이 齎傳國寶하야 詣大梁하야 迎均王한대 王曰 大梁은 國家創業之地니 何必洛陽이리오하고
○ 晉李嗣源이 分兵하야 徇燕山後八州하야 皆下之하고 進逼幽州하다
晉王이 督諸軍하야 四面攻城克之하고 擒劉仁恭及其妻妾하니 守光이 帥妻子亡去라
晉王이 入幽州하야 王이 方宴할새 將吏擒守光適至어늘 王語之曰 主人이 何避客之深耶아
王
이 命掌書記王緘
하야 草露布
注+[釋義]文心雕龍曰 露布者는 蓋露板不封하야 布諸視聽也라 索隱曰 每戰克이면 欲使天下聞知하야 乃以板書獲捷之由하고 不封之하야 以示明告中外라 自後魏以來로 乃書帛하야 建於漆竿上하고 名爲露布라 初學記曰 露布를 人多用之하니 以不知其始라 이라하니라 한대 緘
이 不知故事
하야 書之於布
하고 遣人曳之
하니라
계유(913) - 진晉‧기岐‧오吳는 당唐나라 천우天祐 10년을 칭하였고, 양주梁主 주진朱瑱은 건화乾化 3년이다.
○ 이해에 모두 다섯 나라이고 다섯 진鎭이다. -
양梁나라
조암趙巖이
注+[頭註]조암趙巖은 부마도위駙馬都尉이니, 태조太祖의 딸인 장악공주長樂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대량大梁에 이르자,
균왕均王 주우정朱友貞이 은밀히 그와 함께
주우규朱友珪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조암趙巖이 말하기를 “이 일의 성패는
초토사招討使 양령공楊令公(楊師厚)에게
注+[頭註]양사후楊師厚(楊令公)가 북면도초토사北面道招討使가 되어 위주魏州에 주둔하였다. 달려있으니, 그의 한마디 말을 얻어서
금군禁軍을 타이르면 우리 일이 당장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균왕均王이 마침내 심복인 마신교馬愼交를 보내어 위주魏州로 가서 양사후楊師厚를 설득하기를 “영왕郢王(朱友珪)이 황제를 시해하고 찬탈함에 천하의 인망人望이 대량大梁(朱友貞)에게 있으니, 공公이 만약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이는 세상에 없는 큰 공일 것입니다.” 하였다.
양사후楊師厚가 마침내 그의 장수
왕순현王舜賢을
낙양洛陽으로 보내어 은밀히
원상선袁象先과
注+[頭註]원상선袁象先은 친군도지휘사親軍都指揮使이니, 바로 태조太祖의 생질이다. 그의 아버지 원경초袁敬初는 태조太祖의 누이인 만안대장공주萬安大長公主에게 장가들었다. 도모하게 하였다.
경인일庚寅日(2월 17일) 새벽에 원상선袁象先이 금병禁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돌입하니, 주우규朱友珪가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아내 장씨張氏 및 풍정악馮廷諤과 함께 북쪽 담장의 누대 아래로 달려가서 장차 성을 넘어가려 하였는데, 스스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헤아리고는 풍정악馮廷諤에게 명령하여 먼저 자신의 아내인 장씨張氏를 죽이고 다음으로 자기를 죽이게 하였으며, 풍정악馮廷諤 또한 자살하였다.
원상선袁象先과 조암趙巖이 전국보傳國寶(옥새)를 가지고 대량大梁에 가서 균왕均王을 맞이하자, 균왕均王이 말하기를 “대량大梁은 우리나라가 창업한 곳이니, 하필 낙양洛陽에 도읍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대량大梁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굉鍠으로 고치고 또다시 이름을 진瑱으로 고쳤다.
진晉나라 이사원李嗣源이 군대를 나누어 연산燕山 뒤에 있는 여덟 주州를 순행하여 모두 함락시키고 전진하여 유주幽州를 핍박하였다.
진왕晉王이 제군諸軍을 독려해서 사면으로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유인공劉仁恭과 그의 처첩들을 사로잡으니, 유수광劉守光이 처자를 거느리고 도망갔다.
진왕晉王이 유주幽州에 들어가서 왕王이 막 잔치하려고 할 적에 장수와 관리들이 유수광劉守光을 사로잡아서 마침 이르자, 진왕晉王이 말하기를 “주인이 어찌 이리도 손님을 심하게 피한단 말인가?” 하였다.
진왕晉王이
장서기掌書記 왕함王緘에게 명하여
노포露布를 초하게 하였는데,
注+[釋義]《문심조룡文心雕龍》에 이르기를 “노포露布는 노판露板을 봉함하지 않아서 여러 사람이 보고 듣게 하는 것이다.” 하였고, 《색은索隱》에 이르기를 “매번 싸워 이기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듣고 알게 하고자 하여 마침내 적을 사로잡고 승리한 이유를 판자에 쓰고 이를 봉함하지 않아서 중외中外에 보여 밝게 고하였다. 후위後魏 이래로 마침내 비단에 써서 옻칠한 장대 위에 세우고 노포露布라 이름했다.” 하였다. 《초학기初學記》에 이르기를 “노포露布를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춘추좌조기春秋佐助期》에 이르기를 ‘〈감로甘露가 내릴 적에〉武露는 가벼워서 흩어지고 문로文露는 무거워서 가라앉는다.’라고 하였는데, 송균宋均이 이르기를 ‘감로甘露가 그 나라에 나타날 적에 흩어지면 사람들이 무武를 숭상하고, 문채를 숭상하게 되면 감로甘露가 엉겨서 무겁다.’라고 했다.” 하였다. 왕함王緘이
고사故事를 잘 알지 못하여 이것을 삼베에 써서 사람을 보내어 끌고다니게 하였다.
거란주契丹主의 아우 야율날갈耶律剌葛 등이 배반하자 그 도당을 주벌하고 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