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己卯]〈晉, 岐는 稱唐天祐十六年하고 梁貞明五年이라
吳徐溫
注+[頭註]少販鹽이러니 及楊行密起하야 隷行密帳下라가 遂爲吳將相하다 天復二年에 封行密爲吳王하니라 이 自以權重而位卑
라하야 勸吳王建國稱帝而治
러니 吳王
이 不許
하다
夏
에 卽吳國王位
注+[頭註]隆演이 建國改元하고 用天子禮하야 以溫爲大丞相하고 隆演이 攝行하니 行密第二子라 하다
○ 晉王
이 如魏州
하야 發徒數萬
하야 廣德勝北城
注+[頭註]德勝南北夾河에 皆有城이라 하고 日與梁人爭
하야 大小百餘戰
에 互有勝負
러라
右射軍使石敬瑭
이 與梁人
으로 戰于河
注+[釋義]壖은 而緣反이니 緣河邊地라 按韻書에 本作𤲬하고 或作堧하니 訓郤也라 郤은 隙地也라 師古曰 堧은 游地니 游는 餘也라하니라 할새 梁人
이 擊敬瑭
하야 斷其馬甲
이어늘 橫衝兵馬使
注+[釋義]橫衝은 軍都之號也라 劉知遠
이 以所乘馬授之
하고 自乘斷甲者
하고 徐行爲殿
注+[釋義]王氏曰 徐는 緩也니 說文에 安行也라 殿은 丁練反이니 凡軍居前曰啓요 居後曰殿이요 又謂之斷後라하니 此乃兵家之最難者也라 我兵旣敗하야 敵人來追에 我在後拒之는 非勇敢者면 不能也라 하다
〈敬瑭, 知遠은 其先이 皆沙陀人이니 敬瑭은 後爲晉高祖하고 知遠은 爲漢高祖하니라〉
太祖始以黃巢降將
으로 秉旄宣武
注+[頭註]僖宗이 以朱全忠으로 爲宣武節度使하니라 하고 逞其詐力
하야 蠶食諸夏
하야 地廣兵彊
이라
威權日熾에 志欲無厭하야 遂遷唐祚러니 淫虐不悛하야 禍自內興하니 不得其死 宜矣라
均王
은 로 材不過人
이어늘 棄敬翔, 王彦章
하고 而用趙巖, 張歸霸
하야 以與莊宗爲敵
하니 能無亡乎
아
기묘(919) - 진晉‧기岐는 당唐나라 천우天祐 16년을 칭하였고, 양梁나라는 정명貞明 5년이다.
○ 촉蜀나라는 건덕乾德 원년元年이고, 오吳나라는 선왕宣王 양륭연楊隆演의 무의武義 원년元年이다.
○ 이해에 모두 여섯 나라이고 네 진鎭이다. -
오吳나라
서온徐溫이
注+[頭註]서온徐溫은 젊었을 적에 소금을 팔았는데, 양행밀楊行密이 일어나자 양행밀楊行密의 막하에 예속되었다가 마침내 오吳나라의 장상將相이 되었다. 천복天復 2년(902)에 양행밀楊行密을 오왕吳王에 봉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권력은 막중하지만 지위가 낮다고 하여
오왕吳王에게 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하여 통치할 것을 권하였는데,
오왕吳王(楊隆演)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름에
오왕吳王이
오국왕吳國王에 즉위하였다.
注+[頭註]양륭연楊隆演이 나라를 세워 연호를 고치고 천자天子의 예禮를 사용하여 서온徐溫을 대승상大丞相으로 삼고 양륭연楊隆演이 섭행하니, 양륭연楊隆演은 양행밀楊行密의 둘째 아들이다.
촉주蜀主 왕건王建이 죽으니, 태자太子 연衍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진왕晉王이
위주魏州에 가서 수만 명의 무리를 징발하여
덕승德勝의 북쪽 성을
注+[頭註]덕승德勝의 남쪽과 북쪽 협하夾河에 모두 성이 있었다. 더 넓히고 날마다
양梁나라 사람들과 다투어 크고 작은 백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으나 서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
우사군사右射軍使 석경당石敬瑭이
양梁나라 사람들과
하연河壖에서
注+[釋義]연壖은 이연반而緣反(연)이니 황하黃河 연변의 땅이다. 살펴보건대 《운서韻書》에 본래 𢓊으로 되어 있고 혹은 연堧으로 되어 있으니 훈訓은 극郤이니, 극郤은 공한지空閑地이다.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연堧은 노는 땅이니, 유游는 남아있는 것이다.” 하였다. 싸울 적에
양梁나라 사람이
석경당石敬瑭을 공격하여 말의 갑옷을 끊자,
횡충병마사橫衝兵馬使注+[釋義]횡형橫衡은 군도軍都의 칭호이다. 유지원劉知遠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석경당石敬瑭에게 주고 자신은 갑옷이 끊긴 말을 바꿔 타고는 천천히 가서 군대의 후미가 되었다.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서徐는 느림이니,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천천히 가는 것이다.’ 하였다. 전殿은 정련반丁練反(전)이니 무릇 군대는 선두에 있는 것을 계啓라 하고, 후미에 있는 것을 전殿이라 한다. 그리고 또 이를 일러 단후斷後(후미를 끊음)라고 하니, 이는 병가兵家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우리 군대가 이미 패하여 적들이 쫓아올 적에 내가 후미에 있으면서 적을 막는 것은 용감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양梁나라 사람들은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압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니, 석경당石敬瑭이 이 때문에 그를 친애하였다.
- 석경당石敬瑭과 유지원劉知遠은 그 선조가 모두 사타沙陀 사람이니, 석경당石敬瑭은 뒤에 진晉나라 고조高祖가 되었고, 유지원劉知遠은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되었다. -
“
태조太祖(朱溫)는 처음에
황소黃巢 휘하의 항복한 장수로서
선무군宣武軍의 깃발을 잡고
注+[頭註]희종僖宗이 주전충朱全忠을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로 임명하였다. 속임수와 무력을 부려
제하諸夏(中國)를 잠식하여 영토가 넓어지고 군대가 강성하였다.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해지자 뜻과 욕망이 만족함이 없어서 마침내 당唐나라의 국통을 옮겨갔는데, 음탕함과 잔학함을 고치지 아니하여 화禍가 안에서 일어났으니, 올바른 죽음을 얻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균왕均王은 부귀한 집안의 자제로서 재주가 보통사람을 넘지 못하였는데, 경상敬翔과 왕언장王彦章을 버리고 조암趙巖과 장귀패張歸霸를 등용하여 후당後唐의 장종莊宗과 대적하였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