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言人能處常居之宅하여 抱一淸神能常無離乎면 則萬物自賓也니라
注
能滌除邪飾하여 至於極覽하며 能不以物介其明하여 疵之其神乎면
注
[注]天門은 謂天下之所由從也요 開闔은 治亂之際也라
注
[注]言 至明四達하여 無迷無惑하여 能無以爲乎면 則物化矣라
10.9 生而不有
하며 하며 長而不宰
하니 是謂玄德
이니라
注
非玄
何
잇가 凡言玄德
는 皆有德而不知其主
하니 出乎幽冥
라
첫 번째 세 문장은 신체 수양修養의 방법을 논하고 있으니, 이는 초기 도교道敎에 그러한 수행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술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 해도 영아嬰兒의 형상이 언급되는 것에 주목해보는 것은 재미있다. 제20장, 제28장 그리고 제55장과 같이 이 장에서도 성인은 영아를 모방하고자(emulate) 노력한다. 이러한 상태는 자의식으로부터 자유롭고, 완전히 자발적이며(spontaneous), 어떠한 의도도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양신養神(nourishing the soul)’과 ‘포일包一(embracing unity)’ 같은 도가적 수행은 갓난아이와 같은 상태에 도달하곤 했을 듯하다.
이어지는 글은 성격상 보다 정치적이다. 명백히 신체 수양은 성인 군주가 되는 데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서로가 꼬여 있는 신체 수련[치신治身]과 통치[치국治國 혹은 주술主術]를 상관적으로 이해하는 사상은 선진유가先秦儒家에서도 나타나며, 《노자老子》 제13장과 제54장 또한 그것을 인유引喩하고 있다. 다섯 번째 문장에 나오는 천문天門과 여성성의 형상은 이 장을 제6장과 연관시켜 준다. 성인 군주는 여성적 자질에 근거하여 다스리며 아마도 자연의 재생산 과정의 열리고 닫힘에서 그 비어 있는 문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
늘 머무는 곳에 살면서 하나를 끌어안아 능히 떠나지 않을 수 있는가?
注
재載는 거처하다[처處]는 뜻이다. 영백營魄은 사람이 늘 머무는 주거지이다.
〈이 구절은〉 사람이 능히 늘 머무는 집에 거쳐하면서 하나를 끌어안고 정신을 맑게 하여 〈집과 하나를〉 항상 떠나지 않을 수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손님으로 와서 〈그에게 복종할 것〉임을 말했다.
기氣를 맡겨두고 부드러움을 이루어 능히 갓난아기처럼 될 수 있겠는가?
注
전專은 맡긴다[임任]는 뜻이다. 치致는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다[극極]는 뜻이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뜻을〉 말한 것이다.
자연스러운 기운(숨결)에 맡겨 지극히 부드러운 조화가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여 갓 태어난 아이와 같이 어떠한 욕망도 없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만물이 온전해져서 〈본래의 참된〉 본성을 얻게 될 것이다.
현묘한 거울에 낀 〈사악함과 꾸밈을〉 깨끗이 닦고 제거해내어 능히 흠이 없게 할 수 있는가?
注
현玄은 만물의 궁극이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뜻을〉 말한 것이다.
〈만약 군주가〉 능히 사악하고 꾸며낸 것을 깨끗이 닦고 제거해내어 완벽한 거울과 같은 〈상태에〉 이를 수 있어 어떤 외물도 그 밝음을 훼손하여 그 정신에 흠이 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결국에는 현묘함 그 자체와 같아지게 된다는 뜻이다.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꼼수를 쓰지 않을 수 있는가?
注
〈군주가〉 술책을 부려 성공을 추구하고 술수를 부려 숨겨진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이 ‘꼼수’이다.
전혀 더럽혀지지 않은 현묘한 거울 같은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노자》에서 말하는〉 “성스러움을 끊는다.”는 것과 같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꼼수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노자》가 말하는〉 “앎을 버린다.”는 것과 같다.
군주가 꼼수를 쓰지 않을 수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백성들이 그를 피하지 아니하고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능히 암컷과 같이 할 수 있는가?
注
‘하늘의 문’이란 하늘 아래 모든 만물이 거쳐서 나오는 곳이다. ‘열림과 닫힘’이란 천하가 다스려질 때와 천하가 혼란스러울 때이다.
그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하늘 아래 모두에게 두루 통하여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힌다.”고 한 것이다.
암컷은 응하기만 할 뿐 먼저 울지 않고, 따르기만 할 뿐 먼저 나서지 않는다.
〈이 문장이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군주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능히 암컷과 같이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손님이 되어 복종하고 거처가 저절로 편안해질 것이다.
사방에 두루 밝으면서도 능히 함이 없게 할 수 있는가?
注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군주가〉 사방에 두루 밝아 분간하지 못함이 없고 혹하는 게 없어 무언가를 가지고서 함이 없게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만물이 교화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자》 37.1-3에서〉 이른바 “도는 늘 함이 없으니 후왕侯王이 만약 이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저절로 교화될 것이다.”라고 한 말의 의미이다.
注
〈도가〉 만물의 근원을 막지 않는다는 뜻이다.
注
〈도가〉 만물의 본성을 속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낳으면서 〈그 공로를〉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하면서도 〈지은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장성케 하면서도 주재하지 않으니, 이것을 현묘한 덕이라 한다.
注
〈도가〉 만물의 근원을 막지 않으면 만물이 스스로 살아가게 되니, 어찌 〈군주의〉 공이 있겠는가?
만물의 본성을 속박하지 않으면 만물이 저절로 가지런해지니, 어찌 의존함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고 풍족해져서 내가 주재하여 이루지 않았으니, 〈만물에 베풀어진〉 덕은 있는데 그 주재가 없다.
〈이러한 상황을〉 신비롭다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무릇 신비한 덕을 말한 것은 모두 덕은 있으나 그 주재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그윽하고 어두운 곳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