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하나니 當其無
일새 有器之用
하고 鑿戶牖以爲室
하나니 當其無
일새 有室之用
이라
제11장은 《노자老子》의 유명한 장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장은 바퀴, 그릇, 방, 창문은 물론 문 등의 형상을 통해 도道의 일정한 기능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기본적으로는 도道가 갖는 효용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달리 말해서 이런 사례들은 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최고의 덕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판본板本에 따른 차이는 크게 없으나 죽간본竹簡本에는 이 장이 빠져 있다.
빈 중심과 가득 찬 주변으로 이루어진 구조(the structure of an empty and a full periphery)는 물질적으로 또는 기계적으로는 물론이고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기능한다. 성인은 자신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스스로를 다스린다고 가정되는데, 사회의 중심에 있는 성인 군주는 함이 없고 그럼으로써 국가가 잘 기능하도록 한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언제나 비어 있음 또는 없음이 있음과 가득 차 있음과 나란히 간다는 점이다. 비어 있음 혼자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심지어 그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중심이란 중심이 되게 하는 주변을 필요로 한다. 도가는 일방적으로 비어 있음 또는 무無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도의 한 가지 또는 중심적인 측면일 뿐이며 그것만을 분리하여 말할 수 없다. 비어 있음과 가득 차 있음이 함께해야 이로움을 낳고 완벽하게 사용될 수 있다.
왕필王弼은 다양한 비유적 표현이 등장하는 《노자老子》 경문經文에 비해 두 가지에 주로 초점을 맞춘다. 하나는 유有가 인간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되려면 무無에 의지하거나 혹은 무 자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사용되는 무無는 실질적으로는 비어 있음[허虛]의 의미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왕필의 논리는 대연지수大衍之數에도 해당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수적인 의미는 ‘적은 것이 많은 것을 다스리고 거느린다.[이과통중以寡統衆]’는 사상과도 연결된다.
서른 개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는데 그 바퀴통이 비어 있기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
곡轂곡轂(《고공기도考工記圖》
注
바퀴통이 서른 개의 바퀴살을 거느릴 수 있는 것은 〈그 바퀴통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 빈 곳으로 모든 바퀴살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거느릴 수 있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니 그 그릇 속이 비어 있기에 그릇의 쓰임이 있고,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니 그 방 속이 비어 있기에 방의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까닭은 무無가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
注
나무와 찰흙과 벽으로 〈수레와 그릇과 방〉 세 가지를 완성하는 것은 모두 무無(비어 있음)를 쓰임으로 삼아서이다.
〈이것은〉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까닭이 모두 무無에 의지하여 쓰임이 됨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