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而直云絶이라하니 文甚不足하여 不令之有所屬하면 無以見其指하니라
제19장은 성인聖人의 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백성들을 위해 군주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비자韓非子》 〈양권揚權〉에 나오는 “성인의 도는 지혜와 기교를 없애는 데 있으니, 지혜와 기교가 없어지지 않으면 상도常道를 만들기 어렵다.”라는 구절을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장도 초간본과 왕필본의 내용이 약간 다르다. 초간본은 군주가 버려야 할 세 가지로 ‘변辨(말로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것)과 지智(잔머리 굴리는 것), 교巧(기교)와 이利(이익), 위僞(거짓)와 사詐(속임)’를 들고 있다. 그러나 왕필본은 ‘성스러움과 지, 인과 의, 기교와 이익’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왕필의 해석이 재미있다. 노자는 “성스러움과 지, 인과 의, 기교와 이로움”을 버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왕필은 “성스러움과 지는 뛰어난 재주고, 인과 의는 훌륭한 행실이며, 기교와 이익은 쓰기에 좋은 것”이라고 노자의 생각을 뒤집는다. 그런 좋은 것들을 노자가 끊어버리라고 이야기한 것은 ‘언어화된 것, 즉 문식文飾을 부정한 것’이지 앞의 덕목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글자로 표현된 가치와 실상 사이의 간극에 대해 짚음으로써, 교묘하게 ‘인간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려야 백성에게 이로움이 백 배가 될 것이다.
어짊을 끊고 의로움을 버려야 백성이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워질 것이다.
교사스러움을 끊고 이로움을 버려야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억지로〉 꾸민 것이기에 충분한 것이 못 된다.
그러므로 〈각자의〉 속할 곳이 있게 하면 소박함을 보고 끌어안으며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심을 적게 할 것이다.
注
성스러움과 지혜는 재주의 뛰어남이다. 어짊과 의로움은 행실의 뛰어남이다.
그런데도 〈《노자》의 문장은 이것들을〉 끊어버리라고만 말하고 있으니, 〈억지로〉 꾸민 것이 매우 부족해져 〈백성이〉 속할 곳이 없게 한다면 그것이 가리키는 것을 드러낼 방법이 없게 된다.
그래서 〈《노자》에서〉 “이 세 가지는 〈억지로〉 꾸민 것이기에 충분한 것이 못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속할 곳이 있게 한다면 소박함과 욕심을 줄이는 것에 속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