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注]自然之道는 亦猶樹也니 轉多轉遠其根이요 轉少轉得其本이라
多則遠其眞이니 故曰惑也요 少則得其本이니 故曰得也라
22.7 不自見이라 故明하며 不自是라 故彰하며 不自伐이라 故有功하며 不自矜이라 故長이니라
제22장은 노자老子의 유명한 역설逆說의 논리論理가 처세處世로 드러난 내용을 담고 있다. 굽힘과 온전함, 구부림과 곧게 펴짐, 움푹 패임과 채워짐 등은 제42장에서 말하는 ‘되돌아가는 것이 도道의 운동’이라는 논리가 적용된 것이다. 즉 굽힘으로써 오히려 온전해지고, 구부림으로써 곧게 펴진다는 논리이다. 이런 이해의 방식은 하상공본河上公本이나 왕필본王弼本에서 커다란 차이는 없다.
그러나 경經22.5의 “적어지면 얻고, 많아지면 미혹된다.”는 부분에서는 해석이 크게 갈린다. 하상공河上公은 재산이나 지식이 많은 것은 미혹을 일으키니 적게 줄이고 겸손하며 스스로를 비울 것을 권하는 반면, 왕필王弼은 이와 달리 근본으로부터 가깝고 먼 차이로 설명하여 근본으로 돌아갈 것을 권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주注22.4 ‘부자긍不自矜 즉기덕장야則其德長也(스스로 자만하지 않으면 그 덕이 오래간다.)’의 ‘장長’은 ‘오래간다’와 ‘어른’의 의미를 다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영속성에 포인트를 준 개념인 ‘오래간다’로 해석하는 게 좋을 듯하다. ‘덕德’은 ‘총화總和’를 말하는 것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경지를 말한다. 누군가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무엇인가를 하게 하는 힘이지만 바로 나에게 있는 것, 그게 바로 ‘덕德’이다. 반면 ‘도道’는 덕을 기르기 위해 따라가야 하는 길이기도 하고, 또 그 길을 따라가야만 덕이 생긴다는 규범적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제22장은 《노자老子》가 분명 천하天下의 후왕侯王이 따르고 본받아야 할 일종의 치술治術의 일부로서 처세훈處世訓의 성격을 지닌 규범規範으로 성립成立된 것임을 보여준다.
注
스스로를 옳다고 하지 않으면 그 옳음이 드러난다.
注
자연스러운 도는 또한 나무와 같다. 〈나뭇가지가〉 더욱 많아질수록 그 뿌리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나뭇가지가〉 더욱 적어질수록 그 근본을 더욱 얻게(가깝게) 된다.
많아지면 그 참된 본성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래서 ‘미혹된다’고 했다. 적어지면 그 근본을 얻는다. 그래서 ‘얻는다’고 했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하나를 끌어안아 천하의 모범이 되니,
注
하나는 가장 작은 것이다. 식式이란 그것을 본받는다는 뜻과 같다.
스스로의 〈밝음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 지혜가〉 밝게 드러나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옳음이〉 드러나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 있게 되고, 스스로 자만하지 않기 때문에 〈그 덕이〉 오래간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의 그 누구도 그와 다툴 수 없다.
예로부터 이른바 “굽히면 온전해진다.”고 한 것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진실로 온전해지면 〈천하의 백성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