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注]順自然而行하여 不造不始라 故物得至하여 而無轍迹也니라
注
此五者는 皆言不造不施하고 因物之性하니 不以形制物也하니라
27.5 是以로 聖人은 常善救人이라 故無棄人이요
注
[注]聖人은 不立形名以檢於物하고 不造進向以殊棄不肖하고 輔萬物之自然而不爲始라
不尙賢能하면 則民不爭하고 不貴難得之貨면 則民不爲盜하고
不見可欲하면 則民心不亂하니 常使民心無欲無惑하면 則無棄人矣하리라
注
[注]資
는 取也
라 善人以善齊不善
하고 以善棄不善也
라
注
[注]雖有其智라도 自任其智하고 不因物하면 於其道必失이라
제27장은 《노자老子》의 인재등용책人才登用策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이석명은 《백서로자帛書老子》에서 이 구절의 본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사람은 누구나 적어도 한 가지 재주나 능력이 있는 법이다. 노자는 심지어 악인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찾아 쓰니, 버리는 사람이 없고 버리는 물건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황로학黃老學의 인재등용론에서 매우 중요한 명제가 된다. 그러므로 황로학의 대표작품인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크고 작음 또는 길고 짧음에 상관없이 각각 그 마땅한 사람을 얻으면 천하가 고루 다스려진다. 성인은 두루 아울러 쓰기에 버리는 인재가 없다.’”
《노자》의 이러한 취지에 더해 왕필王弼은 맡김[임任]의 방법을 강조하고 이것은 각각의 사물이 타고난 자연스러운 본성을 따르는 데 있다고 본다. 이는 《노자》 3장에서 논의된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특히 왕필은 “각각 제자리를 얻는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논어論語》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 왕필에 따르면 군주의 무위無爲는 맡김에 있는데, 타고난 능력과 자질에 맡김으로써 각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면 숭상하고 경쟁하는 일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注
자연에 따라 행하여 만들지도 않고 시작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만물이 지극함을 얻어 아무런 흔적이 없다.
注
만물의 본성에 따르고 나누거나 가르지 않는다. 그래서 허물을 남기지 않고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된다.
注
사물 자체의 수에 따르니 외형을 빌리지 않는다.
잘 닫는 자는 빗장으로 잠그지 않아도 열 수 없고, 잘 묶는 자는 밧줄로 묶지 않아도 풀 수 없다.
注
사물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되 세우거나 베풀지 않는다.
그래서 빗장을 사용하여 잠그거나 밧줄을 사용하여 묶지 않아도 열거나 풀 수가 없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만들거나 베풀지 않고 사물의 본성을 따르니 형체로써 사물을 제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인은 늘 사람을 잘 구하는 까닭에 사람을 버리지 않고,
注
성인은 형명形名을 세워서 사물을 단속하지 않고 어떤 목표를 만들어 세워두고서 그에 모자라는 사람을 골라 버리지 않고 만물의 자연스런 본성을 돕되 먼저 시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현명하거나 능력 있는 사람을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지 않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적질을 하지 않고,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으니, 늘 백성들의 마음이 욕심도 없고 유혹당함도 없게 하면 사람을 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늘 만물을 잘 구하는 까닭에 버려지는 물건이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밝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요,
注
선한 사람을 들어 선하지 못한 사람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를 스승이라고 했다.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 취하는 것인데,
注
자資는 ‘취하다’는 뜻이다. 선한 사람은 〈자신의〉 선함으로 선하지 못함을 다스리고 〈자신의〉 선함으로 선하지 못함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 취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취함을 아끼지 않으면 비록 지혜가 있더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니,
注
비록 지혜가 있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지혜에 맡기고 사물에 따르지 않으면 그 도를 반드시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 “비록 지혜가 있더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그 요체가 신비롭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