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1 吾言甚易知하고 甚易行이어늘 天下莫能知하고 莫能行하나니
注
[注]以其言有宗하고 事有君之故라 故有知之人은 不得不知之也라
注
知我益希하면 我亦無匹이라 故曰 知我者希면 則我者貴也라하니라
注
聖人之所以難知
는 以其同塵而不殊
하고 懷玉而不
이라
제70장은 ‘지知’가 ‘안다’는 뜻과 ‘완성하다’라는 뜻을 이중적으로 갖는다는 것을 이용하여 논의하고 있다. ‘지知’에 대한 논의는 제33장과 제56장에서도 다루고 있다.
성인聖人의 말은 알기 쉽고 행하기도 쉽다. 그런데도 그것을 행하거나 배울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도가에서 말하는 〈통치의〉 기예技藝의 역설적 완성은 오로지 자신의 행동, 행위, 의도를 최소화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게다가 성인은 이러한 탈인간화의 기예(art of dehumanization)를 완벽하게 완성한 유일한 인간이다. 곡轂, 즉 바퀴 중심부의 비어 있는 허브는 단 하나이다. 비록 허정虛靜과 무위無爲의 길을 따르는 것이 이론상으로 쉽다 해도, 이 중심의 자리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있을 수 있다.
첫째 부분을 반향反響하면서 셋째 부분은 도가적 통치술의 논리(logic of rulership)에 완벽하게 상응한다. 성인 군주가 군주가 된 까닭은 그가 어떤 특정한 과업도 수행하지 않는, 즉 무無를 체득한(to master nothing)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를 체득함(mastering)으로써 성인 군주는 모두의 주인(the master)이 되는데 이 때문에 그 누구도 그를 지배하지(to master) 못하는 것이다. 성인 군주의 명성(esteem)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어서 제70장은 성인 군주의 아낌과 소박함을 찬양하면서 결론짓는다. 즉 성인 군주는 허름한 베옷을 입는다. 그런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예외적인 존재임을 표현해준다.
때때로 제70장은 《노자老子》의 저자로 추정되는 사람의 우울한 불만, 즉 사람들이 도가적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이를 행하고자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우울한 불만의 표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필자는 《노자》에 어떤 한 사람의 저자著者나 한 사람의 화자話者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노자》에 등장하는 ‘나’, 특히 여기 제70장에 등장하는 ‘나’는 장래가 촉망되는 독자讀者 또는 청자聽者의 ‘나’, 이른바 성인 군주가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해석에 따르면 제70장은 오해되고 있다는 점에 불만을 말하고 있지 않고, 차라리 도가의 역설의 규칙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이 ‘부지不知’라는 ‘쉬운’ 기예를 완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좋은 것이기도 하다. 제70장은 지성적인 독해법讀解法(intelligent readership)의 결핍을 비난하지 않지만, 오히려 이상적으로는 오직 한 사람만이 도의 가르침을 완성하리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밖의 어느 누구도 도를 완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제70장은 《노자》가 이상적으로는 오로지 단 한 사람의 독자나 청자를 의도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내 말은 무척 알기 쉽고 무척 행하기 쉽지만 천하의 〈누구도〉 알 수 없고, 행할 수 없으니,
注
문을 나서거나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기 때문에 “무척 알기 쉽다.”고 했다.
하는 게 없으나 이루기 때문에 “무척 행하기 쉽다.”고 했다.
조급한 욕심에 혹하기 때문에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영리榮利에 미혹되기 때문에 “누구도 행할 수 없다.”고 했다.
注
종宗은 만물의 으뜸이요, 군君은 만사의 주인이다.
저들(으뜸과 주인)을 모를 뿐이다. 이 때문에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注
말에는 으뜸이 있고 일에는 주인이 있는 까닭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알지 못할 수 없다.
注
나를 아는 자가 더욱 드물어지면 내게는 또한 필적할 만한 이가 없기 때문에 “나를 아는 자가 드물면 나는 귀해지리라.”고 했다.
이 때문에 성인은 〈겉으로는〉 갈옷을 입고 〈안으로〉 옥을 품는다.
注
‘〈겉으로는〉 갈옷을 입는다.’는 것은 티끌(세속)과 같이한다는 뜻이요, ‘〈안으로〉 옥을 품는다.’는 것은 그 참된 본성을 보배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성인이 알기 어려운 까닭은 그가 티끌과 같이하면서 두드러지지 않고 〈안으로〉 옥을 품었으면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