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도道의 형상이고 성인聖人의 길잡이이다. 제61장에서 말하듯이 만물萬物은 아래에 처하는 강과 바다로 흘러든다. 이 장에서는 물의 다른 특징으로, 물은 기氣로 이루어진 것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것이지만 또한 단단한 바위조차 이긴다고 말한다. 마치 물은 ‘함이 없으나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것처럼 작용한다. 또한 “바른말은 마치 반대로 하는 말과 같다.”는 것은 《노자老子》의 유명한 역설逆說의 언어를 잘 보여준다.
이 장의 첫 부분도 제28장과 제67장처럼 성적性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유약柔弱이 암컷과 연결된다면 강강强剛은 수컷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의 비유에 의존하는 이 장은 제28장의 “수컷다움을 알고서 암컷다움을 지킨다.”는 생각과도 통한다. 《노자老子》는 이와 같이 자웅雌雄의 이미지에서 유약柔弱의 이미지로, 그리고 수水와 같은 이미지로 다양하게 이동하면서 사유와 실천의 지침을 암시하는 특징적인 수사법을 보여주는 책이다.
또 1930년대에 미국美國에서 활동한 중국中國의 문인文人 임어당林語堂은 이 장에 나오는 “나라의 더러움을 받아들이는 자를 일컬어 사직社稷의 주인이라 하고, 나라의 상서롭지 못한 일을 받아들이는 자를 일컬어 천하의 왕이라 한다.[수국지구受國之垢 시위사직지주是謂社稷之主 수국지불상受國之不祥 시위천하지왕是謂天下之王]”는 말을, 기독교의 《성경》 〈요한복음〉 1:29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와 유사한 톤으로 번역하여 서구의 독자들을 주목시키기도 했다. 《노자老子》의 경구적警句的이고 시적詩的인 표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이 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지만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에는 〈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물〈의 부드럽고 약한 성질〉을 쓰지만 어떤 것도 그것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注
이以는 ‘쓰다[용用]’는 뜻이고, 기其는 ‘물’을 이른다.
물의 부드럽고 약한 〈성질을〉 쓰지만 어떤 것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것과 부드러운 것이 강건한 것을 이기는 것은 천하 사람이 다 알지만 능히 행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이 때문에 성인의 말씀에 “나라의 더러움을 받아들이는 자를 일컬어 사직社稷의 주인이라 하고, 나라의 상서롭지 못한 일을 받아들이는 자를 일컬어 천하天下의 왕이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