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物之所以生
과 功之所以成
은 必生乎無形
하고 由乎無名
하니라
視之라도 不可得而彰하며 體之라도 不可得而知하고 味之라도 不可得而嘗하니라
四象으로 形하되 而物無所主焉하면 則大象暢矣요 五音으로 聲하되 而心無所適焉하면 則大音至矣라
無形이 暢하면 天下雖往이나 往而不能釋也요 希聲이 至하면 風俗雖移나 移而不能辯也라
五物之母는 不炎不寒하고 不柔不剛하며 五敎之母는 不曒不昧하고 不恩不傷하니
雖古今不同
하여 時移俗易
이라도 此
는 不變也
하니 所謂
라
〈노자미지예략老子微旨例略〉은 1951년 왕유성王維誠의 〈위왕필찬로자지략일문지발견魏王弼撰老子指略佚文之發見〉이란 글에서 처음 왕필王弼의 저술로 확인되었다. 하소何邵의 〈왕필전王弼傳〉에 따르면, “왕필이 《노자》에 주注하고, 〈지략指略〉을 지었다.[필주로자弼注老子 위지지략爲之指略]”고 하였는데, 왕유성王維誠은 도장道藏에 전해져오는 익명匿名의 저자著者의 글 〈노자미지예략老子微旨例略〉을 왕필이 지었다고 하는 ‘지략指略’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 후 학자들은 〈노자미지예략老子微旨例略〉이 왕필이 지은 것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도 역주譯註하여 소개한다.
대체로 그러하듯이, 물物이 생성하는 까닭과 공功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반드시 무형無形에서 생겨나고 무명無名에서 말미암는다.
무형無形하고 무명無名한 것은 만물의 으뜸이니,
〈온도로 말하면〉 따뜻하지도 않고 시원하지도 않으며 〈오음五音으로 말하면〉 궁음宮音도 아니고 상음商音도 아니며, 〈귀 기울여〉 듣더라도 알아들을 수 없고
〈눈으로〉 보아도 〈분명한 모습을〉 확인할 수 없으며, 〈몸으로〉 느껴보아도 〈어떤 상태인지 분명하게〉 지각할 수 없고 〈혀로〉 맛보아도 〈어떤 맛인지 분명하게〉 맛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의 ‘사물로서의 상태[위물爲物]’는 뒤섞여 이루어져 있고, 그것의 형상은 〈일정한〉 형체가 없으며, 그것의 소리는 희미한 소리이고, 그것의 맛은 〈어떠하다고〉 확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양한 형태의〉 만물의 근본이 되어서 천지를 포용하고 소통할 수 있으니 〈어느 것이든〉 경유하지 않도록 함이 없다.
만약 〈도道에 대해 어느 하나라고 확정하여〉 ‘따뜻하다’고 하면 ‘차갑다’고 할 수 없고, ‘궁음宮音이다’라고 하면 ‘상음商音이다’라고 할 수 없게 된다.
형체는 반드시 구분하는 바가 있고, 소리는 반드시 〈오음五音 가운데 어느 음인지〉 속하는 곳이 있다.
그러므로 형상으로서 〈특정한〉 형체를 갖는 것은 커다란 상象이 아니고, 음으로서 〈어느 한 음으로〉 소리가 나는 것은 커다란 음音이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네 가지 상象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커다란 상이 〈구체적인 사물로〉 펼쳐질 도리가 없고, 오음五音을 통해 소리 나지 않으면 커다란 음이 미칠 방법이 없다.
그러니 네 가지 상으로 드러나되 만물이 주로 하는 것이 없다면 커다란 상이 〈만물을 통해〉 펼쳐지게 되고, 오음으로 소리 나더라도 마음이 가는 바가 없다면 〈오음을 통해〉 커다란 음이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군주가〉 대상大象을 꼭 쥐고 있으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그에게〉 갈 것이요, 대음大音을 사용하면 풍속이 바뀌게 될 것이다.
무형無形이 〈직접〉 펼쳐지면 천하의 〈백성들이 그에게〉 간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그에게〉 간 것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고, 희성希聲이 이르게 되면 풍속이 바뀌게 되더라도 그 바뀜에 대해 변별할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하늘이 오물五物을 생성할 때에 무물無物로 작용을 삼고, 성인은 오교五敎를 행할 때에 말하지 않음으로 교화를 삼는다.
이 때문에 도道는 〈문자로〉 표현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은 〈문자로〉 규정하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오물五物의 어미는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으며 부드럽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으며, 오교五敎의 어미는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며 은혜롭지도 않고 해롭지도 않다.
비록 옛날과 오늘날이 같지 않아 시대와 풍속이 바뀌고 변하더라도 이것은 변하지 않으니, 이른바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늘이 이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만물이 생성되지 않고, 다스림에 이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옛날과 오늘날이 통하고 시작과 끝이 같다.
옛것을 가지고 오늘날을 다스릴 수 있고 오늘날을 증험하여 옛 시작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항상됨이라는 것이다.
밝거나 어두운 상태와 따뜻하거나 시원한 모양이 없으므로 항상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고 한다.
만물이 생성되고 공이 이루어지는 것이 이것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므로 이것으로 만물의 태초[중보衆甫]를 살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