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老子之書
는 러니 噫
라 로다 觀其所由
하고 尋其所歸
하면 言不遠宗
하고 事不失主
하니라
解其一言而蔽之면 則無幽而不識하니 每事各爲意면 則雖辯而愈惑하니라
夫邪之興也는 豈邪者之所爲乎리오 淫之所起也는 豈淫者之所造乎리오
故不攻其爲也는 使其無心於爲也요 不害其欲也는 使其無心於欲也라
6.3 故竭聖智以治巧僞는 未若見質素以靜民欲하고
故絶司察하고 潛聰明하고 去勸進하고 翦華譽하고 棄巧用하고 賤寶貨라
6.4 夫素樸之道가 不著하고 而好欲之美가 不隱하면
巧愈思精하면 僞愈多變하고 攻之彌深하면 避之彌勤하리니
則乃智愚相欺하고 六親相疑하고 樸散眞離하여 事有其姦이라
蓋捨本而攻末하면 雖極聖智라도 愈致斯災어늘 況術之下此者乎아
夫察司之簡하면 則避之亦簡하고 竭其聰明하면 則逃之亦察하니
6.5 夫不能辯名이면 則不可與言理하고 不能定名이면 則不可與論實也하니라
故有此名이면 必有此形하고 有此形이면 必有其分하여 仁은 不得謂之聖이요 智는 不得謂之仁이니 則各有其實矣라
夫察見至微者는 明之極也요 探射隱伏者는 慮之極也니
夫敦樸之德이 不著하고 而名行之美가 顯尙하면 則脩其所尙而望其譽하고 脩其所顯而冀其利하니라
望譽冀利하여 以勤其行하면 名彌美而誠愈外하고 利彌重이나 而心愈競하리니
父子兄弟가 懷情失直하여 孝不任誠하고 慈不任實하니
6.6 夫城高면 則衝生하고 利興이면 則求深하니
苟存無欲
이면 則
하고 私欲苟行
이면 則巧利愈昏
하니라
故絶巧棄利하여 代以寡欲하면 盜賊無有로되 未足美也라
夫聖智는 才之傑也요 仁義는 行之大者也요 巧利는 用之善也라
本苟不存인댄 而興此三美라도 害猶如之어늘 況術之有利斯以忽素樸乎아
旣知不聖爲不聖하고 未知聖之爲不聖也요 旣知不仁爲不仁하고 未知仁之爲不仁也라
夫惡强은 非欲不强也라 爲强則失强也요 絶仁은 非欲不仁也라 爲仁則僞成也일새러니
《노자老子》라는 책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아! ‘근본을 높여 말단을 그치게 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면 거의 맞을 것이다.〉 유래하는 것을 살피고 귀결되는 것을 탐색하면 말한 것이 근본에서 멀어지지 않고 일처리가 근본을 잃지 않는다.
〈노자老子의〉 글이 비록 5천 글자이나 그것을 꿰고 있는 것은 하나이다.
그 뜻은 비록 넓고 넉넉하지만 그 수많은 말의 〈취지가〉 같은 부류에 속한다.
한마디로 요약한 것을 풀이하면, 어둡지만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일마다 각각 뜻을 삼고자 한다면 비록 아무리 논변할지라도 더욱 미혹되게 된다.
〈나 왕필이〉 이에 대해 논의해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사악함이 생겨나는 것이 어찌 사악한 자가 하는 것이겠으며, 음란함이 일어나는 것이 어찌 음란한 자가 만드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사악함을 막는 것은 진실함을 보존하는 데 있지 감찰을 잘하는 데 있지 않으며, 음란함을 그치게 하는 것은 화려함을 없애는 데 있지 법령法令을 세밀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으며,
도둑질을 없애버리는 것은 욕심을 버리는 데 있지 형벌刑罰을 엄격히 하는 데 있지 않으며, 송사訟事를 그치게 하는 것은 〈얻기 어려운 재화를〉 숭상하지 않는 데 있지 재판을 잘 처리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하는 바를 공격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행위에 무심無心해지도록 만들려는 것이며, 백성들이 욕심내는 것을 해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욕심에 무심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조짐조차 없을 때 일을 계획하고 아직 시작하지 않았을 때에 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움과 지혜를 다 부려서 기교와 속임수를 다스리는 것은 소박한 상태를 드러내어서 백성들의 욕심을 고요하게 하는 것만 못하고,
인의仁義를 일으켜 야박한 풍속을 도탑게 하는 것은 소박한 상태를 견지하고서 독실한 상태를 온전히 하는 것만 못하고,
교묘함과 이로움을 많게 해서 일의 쓸모를 일으키는 것은 사욕私慾을 적게 해서 ‘겉만 화려하고 실없는 경쟁’을 종식시키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사찰司察을 끊고 총명聰明을 드러내지 않고 부지런히 나아가는 것을 없애고 실속 없는 명예를 제거하고, 교묘한 쓰임을 버리고 보화寶貨를 하찮게 여긴다.
오로지 백성들에게 애욕愛慾이 생겨나지 않게 하는 데 달려 있고, 사악한 짓을 다스리는 데 달려 있지 않다.
그러므로 소박함을 드러내어서 성스러움과 지혜를 끊어버리고, 사욕을 적게 해서 교묘함과 이로움을 버리게 하는 것은 모두 ‘근본을 받듦으로써 말단을 그치게 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소박한 도道가 드러나지 않고 호욕好欲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사라지지 않으면,
설령 성스러움과 명철함을 지극히 하여 백성을 감시하고 지혜와 생각을 다하여 백성을 다스린다 하더라도,
〈다스리는〉 기교가 정밀해질수록 속임수는 더욱 변화무쌍해지고 다스림이 가혹해질수록 〈백성들이〉 피하기를 더욱 힘쓴다.
그러면 지혜로운 이와 어리석은 이가 서로 속이고 육친六親이 서로 의심하며 소박함이 흩어지고 진실함이 이탈되어 일에 간사함이 있게 된다.
근본을 제쳐두고 말엽을 다스리면 비록 성스러움과 지혜를 지극하게 할지라도, 위와 같은 재앙을 더욱 초래할 것인데, 더군다나 이보다 못한 술수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가공되지 않은 통나무 같은〉 소박함으로 진정시키면 작위함이 없어도 저절로 바르게 되고 성스러움과 지혜로 다스리면 백성은 궁색하게 되고 교묘함은 커진다.
그러므로 소박한 상태를 〈가슴에〉 품고 성스러움과 지혜는 버려야 한다.
살피고 엿보는 것이 간략해지면 피하는 방법도 간략해지고, 총명聰明을 다하면 도피하는 방법도 세밀해진다.
간략해지면 소박한 상태를 해치는 정도가 적어지고, 세밀해지면 속임수를 교묘하게 하는 정도가 심해진다.
지극하게 감시하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탐색하는 술수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성인과 지혜로운 이가 아닌가?
그 해로움을 어떻게 〈이루 다〉 기록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성스러움과 지혜로움을 끊어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이 백 배가 된다.’라는 것이 그렇게 과장된 말은 아니다.
이름을 분별할 수 없다면 함께 이치를 말할 수 없고, 이름을 정할 수 없으면 함께 내용을 논할 수 없다.
모든 이름은 형상화된 것에서 생겨나고, 형상화된 것이 이름에서 생겨난 적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형상화된 어떤 것이 있고, 형상화된 어떤 것이 있으면 반드시 구분된 것이 있어서 어짊[인仁]은 성스러움[성聖]이라고 이를 수 없고, 지혜로움[지智]은 어짊[인仁]이라고 이를 수 없으니, 그렇다면 제각기 자신의 내용이 있는 것이다.
지극히 은미한 것을 살피고 보는 것은 명철함의 극치이고,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것을 탐구하고 알아맞히는 것은 사려思慮의 극치이다.
지극한 명철함을 다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인이 아니겠으며, 지극한 사려를 다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혜로운 자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내용을 따지고 이름을 규정하여 ‘성스러움을 끊는다’는 말을 관찰하면 미혹됨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도탑고 소박한 덕이 드러나지 않고, 이름과 행동의 아름다운 것이 드러나고 숭상된다면, 사람들은 숭상하는 것을 닦아서 명예를 바라고 드러난 것을 닦아서 이익을 기대한다.
명예를 바라고 이익을 기대해서 행동에 힘쓰면, 이름이 아름다울수록 진실성은 더욱 도외시되고, 이익이 많을수록 마음속으로 더욱 경쟁한다.
부자지간과 형제지간이 정情을 가슴에 품고 있는데도 정직을 상실하여, 효孝는 정성에 의지하지 않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자慈]은 진실함에 의지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이름과 행실을 높인 것이 초래한 결과이다.
풍속이 야박한 것을 근심해서 이름과 행실을 일으키고 인의仁義를 숭상하면 더욱 이러한 속임수를 초래하게 된다.
그런데 더군다나 이보다 하찮은 술수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인仁을 끊고 의義를 버려서 효도孝道와 자애慈愛를 회복한다는 것’이 그리 과장된 것은 아니다.
성城이 높으면 성을 부수는 전차[충衝]가 생겨나고, 이익이 흥성하면 하고자 하는 것이 간절해진다.
진실로 〈조금도〉 욕심내지 않는 마음을 보존하면 비록 상을 줄지라도 도둑질을 하지 않고, 개인적인 욕심을 구차하게 부리면 교묘함과 이로움으로 더욱 혼미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교묘함을 끊고 이익을 버려서 욕심을 적게 하는 것으로 대신한다면 도적이 없게 되어도 그다지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성스러움과 지혜는 재주 중에 뛰어난 것이고, 인仁과 의義는 행동 중에 훌륭한 것이고, 교묘함과 이로움은 용도 중에 최선의 것이다.
근본이 진실로 보존되지 않으면 이러한 세 가지 훌륭한 것을 흥기해도 해로움이 오히려 위와 같은데, 더군다나 술수를 이롭게 여겨서 소박함을 소홀히 함에랴?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심하구나! 얼마나 사물에 대해 깨닫기 어려운가.”라고 탄식하였다.
이미 성스럽지 않음이 성스럽지 않은 줄만 알고 성스러움이 성스럽지 않은 줄은 모르며, 이미 어질지 않음이 어질지 않은 줄만 알고 어짊이 어질지 않은 줄은 모른다.
그러므로 성스러움을 끊어버린 이후에 성스러운 공업功業이 완전해지고, 인仁을 버린 이후에 인의 덕이 두터워진다.
강함을 싫어하는 것은 강해지지 않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해지면 강함을 상실하기 때문이고, 어짊을 끊어버리는 것은 어질지 않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질어지면 작위作爲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스림이 있으면 이에 어지럽게 되고, 편안함을 보전하면 이에 위태롭게 된다.
자신을 뒤로 했는데도 자신이 앞서게 되니, 자신이 앞서게 됨은 자신을 앞세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도외시했는데도 자신이 보존되니, 자신이 보존됨은 자신을 보존하여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공功은 취해서는 안 되고 아름다움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공功이 되는 어미(근본)를 취해야 할 뿐이다.
《노자》에서 “이미 자식을 알아 〈이를 통해〉 반드시 다시 그 어미를 지킨다.”고 하였으니, 이 이치를 잘 탐구하면 어디를 간들 통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