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라老子像(趙孟頫(元))
老子曰 子所言者는 其人與骨皆已朽矣요 獨其言在耳러라
吾聞之컨대 良賈深藏若虛하고 君子盛德이라도 容貌若愚라
去子之驕氣與多欲과 態色與淫志하니 是皆無益於子之身이라
孔子去하여 謂弟子曰 鳥는 吾知其能飛요 魚는 吾知其能游며 獸는 吾知其能走니
走者可以爲罔하고 游者可以爲綸하며 飛者可以爲矰이로되
至於龍하여는 吾不能知其乘風雲而上天이어늘 吾今日見老子하니 其猶龍邪러라
至關에 關令尹喜曰 子將隱矣니 彊爲我著書하니이다
於是에 老子迺著書上下篇하여 言道德之意五千餘言而去하니 莫知其所終하니라
2.1 或曰 老萊子亦楚人也어늘 著書十五篇하여 言道家之用하니 與孔子同時云이라
3.1 蓋老子는 百有六十餘歲라하고 或言二百餘歲라하니 以其脩道而養壽也라
4.1 自孔子死之後百二十九年에 而史記周太史儋이 見秦獻公曰
始秦與周合이라가 合五百歲而離하고 離七十歲면 而霸王者出焉이라
或曰 儋卽老子라하고 或曰 非也라하니 世莫知其然否하니
5.1 老子之子는 名宗이니 宗爲魏將하여 封於段干하니라
宗子注요 注子宮이요 宮玄孫假이니 假仕於漢孝文帝라
而假之子解는 爲膠西王卬太傅하여 因家于齊焉하니라
5.2 世之學老子者는 則絀儒學하고 儒學도 亦絀老子하니
청대淸代의 고증학자 전대흔錢大昕은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에서 《사기史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노한열전제삼老韓列傳第三’이라 되어 있고, 또 사기색은본史記索隱本에도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이라 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장신莊申’이란 두 글자는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볼 때, 《사기史記》 〈노자한비열전老莊申韓列傳〉은 내용에 근거하여 후대에 개작된 제목이다.
노자老子의 열전에 관해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연구가 있으나, 여기서는 주로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면서 특히 앤거스 그레이엄의 《노자전설의 연구》와 리비아 콘 《도의 도》의 최근 연구를 참고하여 논의를 진행한다.
이 열전의 내용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고 세부 내용은 5가지 논의를 중심으로 8단으로 나눌 수 있다.
1.1 노자의 성명姓名, 자字 그리고 출생지, 주요 직위職位
1.2 노자와 공자孔子의 만남
1.3 노자의 출관出關 설화와 《도덕경道德經》 전수
2.1 노자의 또 하나의 후보, 노래자老萊子
3.1 노자의 장수長壽와 그 이유
4.1 노자의 또 다른 후보, 주周의 태사 담儋
5.1 노자 후손後孫의 계보
5.2 노자의 학문學問과 현황
이상과 같은 단 구분에 의거하여 내용을 분류하고, 각각의 사항들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논의를 참고하여 번역, 분석하였다.
노자老子는 초楚나라의 고현苦縣 여향厲鄕의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요,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니 주周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었다.
공자孔子가 주周나라에 가서 노자老子에게 예禮에 대해 물었다.
그때 노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대가 말한 것은 그 말을 한 사람이 그 뼈와 함께 모두 썩어버렸고 그가 한 말만 남아 있소이다.
또한 군자는 때를 얻으면 벼슬에 나아가고 그 때를 얻지 못하면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떠돌 뿐이오이다.
내가 듣건대 훌륭한 상인商人은 〈보화寶貨를〉 창고에 깊이 숨겨두고서 마치 비어 있는 듯이 하고, 군자는 성대한 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모습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합니다.
그대는 교만한 마음과 많은 욕심, 뻣뻣한 태도와 방탕한 뜻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다만 이와 같은 것뿐입니다.”
공자는 그 자리를 떠난 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새는 잘 날아다니고, 물고기는 잘 헤엄치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로 잡으면 되고,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는 낚싯줄로 잡으면 되고, 날아다니는 새는 활로 잡으면 된다.
하지만
용龍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는데, 내가 오늘 노자를 만나보니 그가 바로 용과 같구나!”
문례로담도問禮老聃圖(구영仇英(명明),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
[해설] 그레이엄은 〈노자열전〉에 나타난 노자의 전설 가운데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제시한 요소 한 가지가 노자와 공자의 만남이라고 지적한다. 이 핵심적인 이야기에 대해 그레이엄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질문해야 한다고 한다.
“노담 전설은 어디에서 비롯되어 발전하였는가? 과연 그는 처음부터 《노자》의 저자로서, 도가道家의 창시자로서, 적어도 일개 도사道士로서 알려졌던 것일까? 도대체 어떤 철학적 정치적 관심이 노자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차이들을 형성시켰던 것일까?”(그레이엄, 1998:25)
재미있게도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이야기는 《장자莊子》는 물론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 《설원說苑》, 《공자가어孔子家語》와 같은 문헌들 속에서까지 등장한다. 이 질문에 대한 검토를 거친 후 그레이엄은 공자와 노담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의 기원은 도가가 아니라 유가儒家라고 판단하였다. 그 주된 추론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 이야기의 일반 형식에서 볼 때, 공자는 생애 내내 지극히 다양하고 풍부한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을 맺는 반면, 기원전 100년 이전의 자료에서 노담老聃에 관한 기록들은 하나같이 공자와 노자의 만남이 핵심축으로 전개된다. 사실 공자에게 이 만남은 사소한 것일 수 있다.
∙ 공자와 노담의 만남 이야기는 기원이 유가에 있으며, 도가가 노담을 자기 학파의 대변자로 차용한 것이다. 만약 노담이 처음부터 도가였다면 유가가 자신의 스승을 도가의 제자로 만드는 꼴이 되는데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이는 《논어論語》에서 공자가 은자隱者를 만나는 태도와는 분명 다르다.
∙ 《장자》와 《예기》 〈증자문〉에서는 모두 공자에 대해 ‘구丘’라고 이름을 부른다. 만약 이 이야기가 도가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자신들의 스승을 격하시키는 이런 세부적인 것까지 기록하였을까? 따라서 유가는 자신의 전통에서 보아도 이런 일이 전혀 누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 도가는 딴 속셈이 있지만 유가는 전혀 속셈이 없다. 만약 어떤 어리석은 유자儒者가 그렇게 하였다면 적어도 그는 노담이 인의仁義를 가르치는 유가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 도대체 그들은 노담을 단지 장례葬禮의 세부 사항을 가르친 선생으로 두었던 것일까?
∙ 《장자莊子》 〈내편內篇〉에서 노담은 망해가는 ‘주周나라의 징장사徵藏史(archivist)’라는 대단히 무료한 직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공자에게 하는 말이 〈노자열전〉에서 왜 하필이면 “그대가 말한 것은 그 말을 한 사람이 그 뼈와 함께 모두 썩어버렸고 그가 한 말만 남아 있소이다.”처럼 문헌 전통에 대한 경멸적 언사였던 것일까? 또한 《장자》 〈내편〉에는 주周, 주 문왕周 文王, 주 무왕周 武王, 주공周公에 대해 일체의 언급이 없다. 외外‧〈잡편雜篇〉에서 유일하게 한 번 주 문왕이 나오는데 그 이야기도 주나라에 호의적이지 않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노담의 관직이 주나라에 있었던 것일까?
∙ 사마천司馬遷 이전의 문헌에는 노담은 단지 노담일 뿐 그에게 성姓이란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그는 단지 ‘술이부작述而不作’하는 옛 전통의 수호자로서 존경받는 유가의 전설적 인물로 아주 제격이다. 그런데 왜 도가에서는 자기 학파의 창건자에게 이름 주는 것조차 못하였을까?
∙ 《사기》 이전의 문헌에서는 노담을 노자老子라고 부르는 것이 달갑지 않아 보인다. 거의가 다 노담일 뿐 노자가 아니며, 노담이 권위를 갖는 유일한 사건은 공자를 가르친 사건뿐이다.
∙ 만약 《장자》 〈내편〉이 공자와 노담이 만난 사건의 최초 기록이라면, 주목해야 할 것은 《장자》 〈내편〉에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도가의 대변자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또한 거기에서 노담은 일정한 위치를 갖는데 그것은 결코 도가로서가 아니다.
이와 같은 그레이엄의 치밀한 분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제부터는 노자와 노담의 관계를 살펴보자. 과연 노담이 노자와 연결된 것은 어느 때, 어떤 식으로였을까?
그의 가르침은 스스로 은둔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데에 힘쓰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주周나라에 머물다가 주나라가 쇠락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떠나갔다.
함곡관函谷關에 이르자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은둔하고자 하시는군요. 제발 저를 위해 글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노자는 도道와 덕德의 뜻을 말한 5천여 언의 상하上下 두 편의 글을 써주고는 떠나가버리니 아무도 그가 어디서 인생을 마쳤는지 알지 못한다.
[해설] 〈노자열전〉에서 공자가 노자를 만났다는 기록을 부정한 것으로는 처음으로
송대宋代 섭적葉適의 《
학습기언學習記言》이 있고, 다음은
송말宋末 나벽羅璧의 《
지유識遺》이고,
청대淸代 최술崔述의 《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이 있다. 최술은 공자가 여러
은일隱逸을 만났는데도 노자에 대해 《
논어論語》에 기록이 없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우며, 아마도
양주楊朱가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노자열전〉에 나오는 공자와 노자의 대화가 실제로는 《
장자莊子》 〈
외물外物〉에서
노래자老萊子가 한 말을 바탕으로 기술한 듯한 반면, 〈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록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노자》와 노담이 얼마나 다른가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적어도 선진문헌에 기록된 노담의 사상은 《노자》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노자열전〉에서는 노담이 도와 덕을 닦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함곡관을 나서면서 관령 윤희에게 《
도덕경道德經》을 전수해주었다는 내용이 바로 이어진다. 그런데 뒤에서 사마천은 다시 주나라
태사太史로서
진 헌공秦 獻公을 만나 진이
패자霸者가 될 것을 예언하는
담儋을 거론하면서 그가 앞서 이야기한 노담인지 아닌지를 미지의 과제로 남겨놓았다. 이러한 혼동은 여기에 이어지는 구절과도 연결된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노래자마저도 그 독자성이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자와 동시대성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정선鄭敾(조선朝鮮))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노래자老萊子도 초楚나라 사람인데 글 15편을 지어서 도가道家의 묘용妙用을 말하였으니, 공자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해설] 여기서
사마천司馬遷은
노담老聃과 마찬가지로 초나라 사람이면서 도가의 실천성을 말하였던 공자와 동시대 인물인 노래자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는 저서의 편수가 15편이나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노담과는 다른 인물로 보인다. 이어지는 논의는 아주 재미있다.
노래자老萊子(《고사전도상高士傳圖像》)
대개 노자는 160여 세를 살았다고 하고, 또는 200여 세를 살았다고 하니, 이는 그가 도道를 닦아 수명壽命을 길렀기 때문이다.
[해설] 이 구절은 노자가 장생술長生術을 닦은 사람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수명의 연장은 한대漢代에 방사方士 전통의 유행 이후의 논의이다. 또한 한대에 이해되었던 노자 이해, 특히 《하상공장구河上公章句》식의 이해에 의하면 《노자》는 분명 양생養生 혹은 연년延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러한 장치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까닭은 이어지는 다음의 구절에서 이해된다.
그런데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기억해야 할 것은 이른바 장생에 관한 희구希求가 고대 중국에서 언제 가장 유행하였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진 시황秦 始皇과 한 무제漢 武帝, 두 군주는 영원한 제국, 영원한 황제를 꿈꾸며 자신들의 불사약不死藥을 구하기 위해 갖가지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사기》는 한 무제 때 지어진 작품이다. 이런 점은 두고두고 곱씹어볼 일이다.
공자가 죽은 지 129년 뒤에 사관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주周나라의 태사太史 담儋이 진 헌공秦 獻公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처음 진秦나라가 주周나라와 합쳐졌습니다. 합친 지 500년이 되자 나뉘어졌습니다. 뉘어진 지 70년이 지나면 〈진나라에서〉 패왕霸王이 나올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한〉 담이 곧 노자이다.”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노자가〉 아니다.”라고 하는데, 세상 누구도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알지 못한다.
[해설] 공자가 죽은 해는 기원전 479년이고 주周의 태사太史 담儋이 진 헌공秦 獻公을 만난 사건은 기원전 374년이다. 사마천은 일정한 연대기 속에서 사건을 기술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양자의 차이는 105년밖에 나지 않는다. 이런 연대 설정의 오류를 제외한다 해도, 적어도 이것은 주나라의 수장실지사守藏室之史인 노담과 주나라의 태사 담을 동일시하려는 모종의 속셈이라고 가정해볼 수 있다.
염약거閻若璩에 따르면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는 공자와 노담의 대화 가운데 일식日食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춘추》에 나오는 일식 기사와 일치한다. 이를 근거로 추산하면 공자의 나이 38세 때의 일이다. 이러한 설에 근거하면 공자가 38세에 만난 한 나이 든 스승 노담이 그 후 105년을 더 살아서 진의 헌공을 만나 진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 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노담과 주나라의 태사 담을 연결시키고, 노자의 장생長生을 증거하는 등 여러 가지 효과를 갖는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사실 그대로 이해될 수 있을까? 다음의 구절은 노자가 왜 이이李耳가 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노자의 아들은 이름이 종宗인데, 종은 위魏나라의 장군이 되어 단간段干에 봉해졌다.
종의 아들은 주注이고, 주의 아들은 궁宮이며, 궁의 현손은 가假이니, 가는 한나라 효문제孝文帝 때 출사하였다.
그리고 가의 아들 해解는 교서왕 앙膠西王 卬의 태부太傅가 되어, 이 때문에 〈그의 가문이〉 제齊 지방에서 살게 되었다.
[해설] 이 구절은 거꾸로 읽어야 한다. 우리는 이 기록에서 노자 후손의 계보를 보게 되는데, 거기서 두드러진 인물은 위나라에서 장군이 된 종宗, 한나라 효문제 때 벼슬하였던 가假와 그의 아들 해解이다.
앞서 주나라가 쇠망하는 것을 본 노담은 서쪽으로 떠나는데, 《한서漢書》나 《여씨춘추呂氏春秋》의 기록 등을 고찰할 때, 관윤關尹은 역사상의 실존 인물로서 장주莊周보다는 조금 앞서는 기원전 4세기의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주나라의 태사인 담과도 일치하는 것이며 또한 200여 세에 가까운 노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설정은 매우 일목요연한 설정이 된다. 그랬던 그가 서쪽으로 갔다면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종은 노담의 아들이 되는 격인데, 아쉽게도 태사 담이 진 헌공을 만났던 때인 기원전 374년은 사마천의 기록에 따라 7대를 거슬러 올라가니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위나라의 장군이 되었다던 종은 어느 시대의 사람일까? 노담이 공자와 동시대인에서 출발한다면 그리고 그가 젊어서 자식을 보았다면 적어도 그는 기원전 5세기 어느 때에 살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기원전 403년까지는 위魏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상식적으로 본다면 그는 기원전 4세기 중엽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불일치들은 상기의 계보가 믿을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레이엄은 단지 두 가지 사건을 중시하면서 달리 해석한다. 즉 노담이 서방으로 여행한 것과 《도덕경道德經》 전수傳受라는 사건은 노담이라는 인물과 연결시키기에 좋은 거리들이었고, 아마도 진秦나라에서 《노자》에 대해 호의를 얻기 위해 지어진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담이라는 이름을 지닌 노자가 출현한 것, 그리고 그 권위는 공자의 스승이었다는 점, 그가 노담이자 곧 주나라의 태사 담이라는 것은 대략 《노자》가 성립된 이후의 시점인 기원전 240년경이라는 것이다.
그랬다가 상황은 또 바뀐다. 왜냐하면 진나라가 망하고 한漢나라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레이엄은 한나라의 유력한 이씨李氏 가문이 노자老子가 자신의 조상이라 주장하였기에 노자老子는 이씨李氏가 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노담의 이름은 이이李耳가 되고, 그의 출신 지역은 주周에서 초楚의 고현苦縣이라 하는데, 이곳은 한나라 황실의 조상의 고향인 패沛의 바로 옆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래서 노담老聃, 태사太史 담儋, 이이李耳는 자연스럽게 노자라는 하나의 인물 속에서 어우러지고 또한 사마천의 〈노자열전〉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효문제 시절의 이씨 가문은 매우 유력한 가문이었다.
세상에서 노자老子를 배우는 자들은 유학儒學을 배척하고 유학을 배우는 자들 또한 노자를 배척한다.
“도道가 같지 않으면 서로 논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어찌 옳은 것이겠는가?
이이李耳는 무위無爲하면서 스스로 변화하고, 맑고 고요한 가운데 스스로 바르게 하였다.
[해설] 이 부분의 서술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난세亂世를 살아가는 지혜에 대한 찬탄贊嘆일까, 아니면 조소嘲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