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南廻
하야 過吉州
에 得
二十四日
하니 忻悚兼至
로라
遠地無可與語者
라 故自山召至
하야 留十數日
하니라 實能外
하고 이라
及祭神至海上
에 遂造其廬
하고 及來袁州
에 留衣服爲別
하니 乃人之情
이요 非崇信其法
하야 求
利益也
니라
凡君子
에 自有法度
하고 聖賢事業
이 具在
하야 可效可師
하니 仰不愧天
하고 俯不愧人
하며 內不愧心
이니라
積善積惡
에 殃慶自各以其類至
하나니 何有去聖人之道
하며 舍
하고 而從
하야 以求福利也
리오
傳又曰
라하니 假如釋氏能與人爲
라도 非守道君子之所懼也
어든 況萬萬無此理
아
若君子也ᄂ댄 必不妄加禍於守道之人이요 如小人也ᄂ댄 其身已死하고 其鬼不靈이라
楊墨交亂
하야 而聖賢之道不明
이면 則三綱淪
하고 而
하며 禮樂崩
하고 而夷狄橫
하리니 幾何其不爲禽獸也
리오
夫楊墨行하야 正道廢가 且將數百年이러니 以至於秦하야 卒滅先王之法하고 燒除其經하며 坑殺學士하니 天下遂大亂하니라
其後始除
하고 稍求亡書
하고 招學士
하니 經雖少得
이나 尙皆殘缺
하야 十
二三
하니라
故學士多老死
하고 新者不見全經
하야 不能盡知先王之事
ᄅ새 各以所見爲守
하야 하니 群聖人之道
가 於是大壞
하니라
孟子雖賢聖이나 不得位하야 空言無施하니 雖切何補리오
故愈嘗推尊孟氏하야 以爲功不在禹下者는 爲此也니라
已來
로 群儒區區修補
나 이 하야 하야 하야 寖以微滅
이어늘
於是時也에 而唱釋老於其間하야 鼓天下之衆而從之하니 嗚呼라
孟子不能救之於未亡之前이어늘 而韓愈乃欲全之於已壞之後하니 嗚呼라
雖然
이나 使其道由愈而粗傳
이면 雖滅死
라도 無恨
이리라
天地鬼神
이 하니 又安得因
로 自毁其道
하고 以從於邪也
리오
古來書自司馬子長答任少卿後로 獨韓昌黎爲工이나 而此書尤昌黎佳處라
반복反覆이 일정하지 않고 변화變化가 헤아릴 수 없으니, 창려昌黎의 글 중에 이 편지를 으뜸으로 꼽아야 한다.
행관行官인 내가 남방南方에서 돌아와 길주吉州를 지날 때에 24일에 보내신 오형吾兄의 수서手書 몇 장을 받으니 기쁜 마음과 황송한 마음이 함께 지극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가을로 접어든 이래로 침식寢食이 어떠하신지요.
주신 편지에 “어떤 사람이 한유가 근자에 석씨釋氏(釋迦牟尼)를 약간 신봉한다고 전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전한 자의 망언妄言입니다.
조주潮州에 있을 적에 호號가 대전大顚이라는 한 늙은 중이 있었는데, 제법 총명하여 도리를 알았습니다.
조주는 도성都城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서 함께 말을 나눌 만한 자가 없으므로 그를 산사山寺에서 주곽州郭으로 초치招致하여 수십 일을 유숙留宿시켰는데, 그는 실로 형체形體를 도외시하고 도리로써 자기를 억제하여 사물事物의 침란侵亂을 받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이야기를 할 때 비록 그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요컨대 그는 마음속에 〈세간의 욕망으로 인한〉 막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얻기 어려운 사람으로 여겨 그와 내왕來往하였습니다.
해신海神에게 제사하기 위해 해상海上에 갔을 적에 드디어 그의 집을 방문訪問하였고, 원주袁州로 올 때에 의복을 남겨주고 그와 작별하였으니, 이는 인정으로 〈방문하고 옷을 남겨준 것이지〉 불법佛法을 높이고 신봉하여 복전福田의 이익利益을 구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자孔子께서 “내가 기도한 지가 오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군자의 처신處身과 행사行事에는 본래 법도가 있고, 성현의 사업이 모두 방책方冊에 실려 있어, 본받을 수 있고 스승으로 삼을 수 있으니,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으며 안으로는 마음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선행善行을 쌓거나 악행惡行을 쌓으면 복경福慶과 재앙災殃이 각각 그 종류種類에 따라 이르는 것이 〈정해진 이치이니,〉 무엇 때문에 성인의 도와 선왕의 법을 버리고서 오랑캐의 가르침을 따라 복리福利를 구하겠습니까?
복을 구함이 사벽邪僻(不正)하지 않으셨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위협에 겁먹지 않고 이익에 병들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가령 석씨釋氏가 사람들에게 화禍를 줄 수 있다 하여도 도를 지키는 군자가 두려워할 바가 아닌데, 더구나 이럴 리가 만무萬無한 데이겠습니까?
그리고 또 저 부처란 자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만약 부처가 군자였다면 반드시 도를 지키는 사람에게 함부로 화를 주지 않을 것이고, 만약 소인이었다면 그 몸이 이미 죽었고 그 귀신도 영험靈驗하지 못할 것입니다.
천신天神과 지기地祇가 사방에 밝게 분포分布하여 삼엄하게 나열해 있어 속일 수가 없으니, 또 어찌 그 귀신으로 하여금 제 마음대로 행동하여 인간에게 화를 주고 복을 주도록 버려두겠습니까?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근거가 없는데, 부처를 신봉한다면 이 또한 미혹迷惑된 것입니다.
또 내가 석씨釋氏를 돕지 않고 배척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맹자孟子가 “오늘날 천하의 학설學說이 양주楊朱를 따르지 않으면 묵적墨翟을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양묵楊墨의 사설邪說이 번갈아 천하를 어지럽혀 성현聖賢의 도가 밝아지지 않으면 삼강三綱이 몰락沒落하고 구법九法이 파괴되고 예악禮樂이 무너지고 오랑캐가 횡행橫行할 것이니, 금수禽獸가 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맹자가 “능히 말로라도 양묵을 거절하는 자는 성인의 무리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양자운揚子雲(揚雄)이 말하기를 “옛날에 양묵의 사설邪說이 정도正道의 길을 막자, 맹자가 〈사설의 그릇됨을〉 자세히 설명하고 배척하여 막힌 길을 깨끗이 치웠다.”라고 하였습니다.
저 양묵의 사설이 횡행하여 정도가 폐기된 지 거의 수백 년이 되었는데, 진秦나라에 이르러 마침내 선왕先王의 법을 다 없애고 성인의 경서經書를 불사르고 학사學士들을 묻어 죽이니 천하가 드디어 크게 혼란하였습니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들어선 지 거의 백 년이 되도록 오히려 선왕의 도를 수명修明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 뒤에 비로소 협서율挾書律을 없애고서 차츰 없어진 책을 구하고 학사學士들을 초빙招聘하니, 경서는 비록 조금 구하였으나, 오히려 모두 잔결殘缺되어 열에 두셋은 없어졌습니다.
옛 학사學士들은 대부분 늙어죽었고, 새로운 학사들은 온전한 경서를 보지 못하여 선왕의 일을 다 알지 못하므로 각각 자기가 본 경서만을 고집하여, 학설이 분리되고 서로 저촉되어 의견이 합일되지도 공정하지도 못하니, 이제二帝와 삼왕三王 등 여러 성인의 도가 이로 인해 크게 파괴되었습니다.
후대 학자들이 성인의 종적을 찾아 따를 곳이 없어서 지금에 이르러서 이처럼 민멸泯滅된 것입니다.
이 재화災禍는 양묵의 사설이 횡행하는데도 금지하지 않은 데서 나온 것입니다.
맹자가 비록 성현이었으나, 직위職位를 얻지 못하여 빈말만 하고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말씀이 비록 간절하였으나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말씀을 힘입어 지금의 학자들이 오히려 공자孔子를 존경하고 인의仁義를 숭상하고 왕도王道를 귀하게 여기고 패도霸道를 천하게 여길 줄을 알게 되었을 뿐이고,
성인의 대경大經과 대법大法은 모두 없어지는데도 구원하고 못하고, 파괴되는데도 수습하지 못하였으니,
이른바 ‘천분의 십, 백분의 일을 보존하였다.’는 것이니, ‘깨끗이 치웠다.’는 것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때 가령 맹자가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옷을 입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맹자를 추존하여 그 공이 우禹임금에 못지 않다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한漢나라 이래로 여러 유자儒者들이 조금씩 수정하고 보완하였으나, 상처투성이가 된 대경大經 대법大法이 이내 어지러워지고 이내 유실遺失되어, 그 위태로움이 마치 한 올의 머리카락으로 천 균鈞의 물건을 끄는 것과 같아, 끊어지지 않고 겨우 이어오면서 점점 미약해져서 소멸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 그 사이에서 불교佛敎와 도교道敎를 제창하여 천하 사람들을 부추겨 따르게 하니, 아!
불교와 도교의 해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해보다 지나치고, 나의 현능賢能은 맹자孟子에 미치지 못합니다.
맹자는 〈성인의 도가〉 없어지기 전인데도 구원하지 못하였는데, 나는 이미 무너진 뒤에 보전하려 하니, 아!
이 또한 자신의 힘을 요량하지 못한 것입니다.
장차 몸이 위험을 당하여 도를 구원하지도 못하고 죽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도가 나로 인해 조금이나마 전해진다면 나는 비록 죽는다 해도 절대로 회한悔恨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지의 귀신이 위에서 굽어보고 곁에서 질책質責하시니, 어찌 한 번의 좌절挫折로 인해 스스로 성인의 도를 훼기毁棄(버림)하고서 사교邪敎를 따르겠습니까?
장적張籍과 황보식皇甫湜 등에게 누차 지도해 가르쳤습니다만 그들이 과연 성인의 도를 배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형吾兄의 두터운 돌보심을 받고도 오형의 명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만 더해질 뿐입니다.
예로부터 서신書信으로는 임소경任少卿에게 보낸 사마자장司馬子長(司馬遷)의 답서答書가 〈가장 뛰어나고,〉 그 뒤로는 유독 한창려韓昌黎의 서신만이 정교한데, 이 서신은 창려昌黎의 서신 중에서도 더욱 아름다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