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蘄至於古之立言者
면 則無望其速成
하고 하며 하라
根之茂者
는 其實
하고 膏之沃者
는 其光曄
하며 은 其言
也
니라
如是者亦有年
이로되 猶不改然後
에 識古書之正僞
와 與雖正而不至焉者
가 然白黑分矣
로라
吾又懼其雜也
하야 之
하고 平心而察之
하야 其皆醇也然後
에 이로라
雖然이나 不可以不養也ᄅ새 行之乎仁義之途하고 游之乎詩書之源하야 無迷其途하고 無絶其源하야 終吾身而已矣니라
氣之與言도 猶是也하야 氣盛則言之短長與聲之高下者皆宜니라
君子則不然하야 處心有道하고 行己有方하야 用則施諸人하고 舍則傳諸其徒하고 垂諸文而爲後世法이니라
問於愈者多矣나 念生之言은 不志乎利일새 聊相爲言之하노라
篇中云 仁義之人은 其言藹如也라하니 卽此中間又隔許多歲月階級이라
작가作家의 작문법作文法을 엿보고자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은 근기根基(基礎)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자구字句를 배열하는 것만으로 좋은 문장이 되기를 바라니, 어찌 될 수 있겠는가?
6월 26에 유愈는 이생李生 족하足下께 고하오.
그대가 보낸 편지는 문사文辭가 매우 뛰어난데도 묻는 태도가 어쩌면 이리도 겸손하고 공손하단 말이오.
능히 이와 같이 한다면 누군들 그대에게 자신의 도道를 일러주려 하지 않겠소.
도덕의 수양이 머지않아 성취成就[歸]될 것인데, 하물며 도덕을 밖으로 표현하는 문장이야 더 말할 게 있겠소.
그러나 나는 이른바 공자孔子의 문장門牆만을 바라보고 그 집안에는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니, 어찌 옳고 그름을 알 수 있겠소.
비록 그러나 그대를 위해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소.
그대가 바로 고어古語에 말한 ‘입언자立言者’이니, 그대의 행위와 그대의 기대가 옛날의 입언자와 매우 유사하고 근접하였소.
그러나 나는 그대의 뜻이 남보다 뛰어나서 남들의 인정을 받기를 바라는 데 있는지, 혹은 옛날 입언자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데 있는지 모르겠소.
남보다 뛰어나서 남의 인정을 받기를 바라는 데 있다면 그대는 이미 남보다 뛰어나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소.
혹은 옛날 입언자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데 있다면 빨리 성공하기를 바라지도 말고, 권세權勢(벼슬)나 이록利祿(祿俸)에 유혹誘惑당하지도 말며, 뿌리를 배양培養하여 결실結實을 기다리고 등잔에 기름을 부어 빛이 밝아지기를 기다리시오.
뿌리가 무성한 나무는 그 열매가 풍성하고 기름을 부은 등잔은 빛이 밝아지듯이, 인의仁義가 있는 사람은 그 언론言論이 따뜻하고 부드럽다오.
그러나 더욱 어려운 것이 있으니, 내가 지은 글이 입언자立言者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아직 이르지 못하였는지를 나 자신이 모른다는 점이오.
비록 그렇다 해도 내가 문장을 학습學習한 지가 이미 20여 년이 되었소.
처음에는 삼대三代와 양한兩漢의 글이 아니면 감히 보지 않고, 성인의 뜻이 아니면 감히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소.
집에 있을 때는 다른 일은 모두 잊은 것 같았고 길을 갈 때는 다른 생각은 모두 잊은 것 같았으며, 엄숙하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멍청하게 미로를 헤매는 것 같기도 하였소.
마음속의 생각을 끄집어내어 손으로 글을 쓸 때는 오직 진부陳腐한 말을 제거하기만을 힘썼으니 참으로 어려웠고, 이 글을 남에게 보여줄 때는 남의 비난과 비웃음을 비난과 비웃음으로 알지 않았소.
몇 해를 이렇게 하면서 여전히 나의 생각을 바꾸지 않은 뒤에 비로소 고서古書 중에 순정純正한 것과 순정하지 못한 것, 비록 순정하지만 지극하지 못한 것이 흑백黑白처럼 분명하게 판별되었소.
순정하지 못한 것과 순정하지만 지극하지 못한 것들을 힘써 제거하고서야 서서히 터득되는 것이 있었소.
마음속의 생각을 끄집어내어 손으로 글을 쓸 때 마치 물 흐르듯이 글이 내려갔소.
그러나 남들에게 보여줄 때에 남들이 비웃으면 나는 기뻐하고 남들이 칭찬하면 나는 근심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문時文의 색채色彩가〉 남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오.
또 이렇게 몇 년을 계속한 뒤에 비로소 문장의 기세가 큰물처럼 세차게 흘러나왔소.
나는 또 문장이 난잡하게 될까 두려워, 잘못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평정한 마음으로 살펴서 모두 순정한 뒤에야 생각나는 대로 써내려갔소.
비록 그렇다 해도 도덕과 학문을 함양涵養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인의仁義의 길을 걷고 시서詩書의 근원에서 헤엄치면서 이 목숨이 다하도록 그 길을 헤매지 않고 그 원류源流가 끊이지 않게 할 뿐이오.
기氣는 물과 같고 언言(文章)은 물 위에 떠 있는 부물浮物과 같으니, 물이 크면 크고 작은 부물이 모두 뜬다오.
기氣와 언言의 관계도 이와 같아, 기氣가 성대하면 언言(語句)의 장단長短과 성운聲韻의 고하高下가 모두 알맞게 된다오.
비록 이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스스로 완성의 단계에 근접하였다고 할 수 있겠소.
비록 완성의 단계에 근접했다 하더라도 이 문장이 사람을 등용하는 자에게 어찌 인정을 받을 수 있겠소.
비록 그러나 남에게 쓰이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찌 쓰이기를 기다리는 용기用器와 같지 않겠소.
쓰고 버리는 것이 사람의 손에 달렸으니 말이오.
군자는 그렇지 않아서, 용심用心에 도의道義가 있고 처신處身에 준칙準則[方]이 있어서, 쓰임을 받으면 도道를 사람들에게 베풀고, 버림을 받으면 도道를 문도門徒에게 전하고, 문장文章으로 전하여 후세에 법法이 되게 한다오.
고문古文에 뜻을 둔 자가 드무니, 이는 고문에 뜻을 두면 반드시 지금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기 때문이오.
〈나는 고문에 뜻을 둔 사람을 만나면〉 참으로 기뻐하면서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슬퍼하였소.
그런데도 자주 그런 사람을 칭찬한 것은 그 사람을 권면하기 위한 것이었지, 감히 칭찬할 만하면 칭찬하고 비난할 만하면 비난한 것이 아니었소.
내게 묻는 자가 많았으나, 〈대답해준 경우가 없었는데,〉 그대의 말은 공리功利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되므로, 애오라지(부족하나마) 그대를 위해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오.
당형천唐荊川(唐順之)이 말하기를 “이 문장은 억양抑揚하여 전환轉換한 곳을 보아야 한다.
‘꿰미에 구슬을 꿰어놓은 것 같다.’는 말은 아마도 이 문장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또 “이 편篇 중에 ‘인의仁義의 덕행이 있는 사람은 그 말이 따뜻하고 부드럽다.’라고 하였는데, 그 중간에 또 많은 세월의 계급階級(段階)을 거른 것이다.
단지 창려昌黎는 문장으로 도를 표현하였을 뿐이므로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모호하게 말하였으니, 이는 마음속 공부의 실제를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