魏晉以後로 宋齊梁陳迄于隋唐之際히 孔子六藝之遺가 不絶如帶矣하니라
昌黎韓退之崛起
하야 泝孟軻
賈誼晁錯董仲舒司馬遷劉向揚雄及
之旨而
之
하니 於是時
에 譽者半
이요 毁者半
이로되 獨
二三輩
가 相與遊從
하야 深知而篤好之耳
니라
於擧世聾瞶中
에 而欲獨以
鏗鍧其間
하니 甚矣其難也
라
又三百年而歐陽公脩蘇公軾輩相繼出
하야 始
之
하니 而天下之文
이 復趨於古
하니라
隋唐之文
은 其患在靡而弱
이로되 而退之之出而振之
가 固已難矣
어늘 迺若近代之文
은 其患在勦而贋
하니 有志者苟欲出而振之
라도 而其爲力也
가 不尤
乎其難矣哉
아
要之컨대 必本乎道하야 而按古六藝者之遺라야 斯之謂古作者之旨云爾라
予故於漢西京而下로 八代之衰不及一人也하니라 首揭昌黎韓文公愈하야 錄其表狀九首, 書啓狀四十六首, 序三十三首, 記傳十二首, 原論議十首, 辯解說頌雜著二十二首, 碑及墓誌碣銘五十二首, 哀詞祭文行狀八首하야 釐爲十六卷하니라
昌黎之奇
가 於碑誌
에 尤爲
이나 予竊疑其於太史遷之旨或屬一間
이라
書記序辯解及他雜著
는 公所
니 譬則達摩西來
하야 獨開禪宗矣
라
위魏‧진晉 이후로 송宋‧제齊‧양梁‧진陳을 거쳐 수隋‧당唐에 이르기까지 공자孔子께서 전하신 육예六藝의 유지遺志가 거의 끊어져가는 띠처럼 겨우 명맥命脈만 붙어 있었다.
창려昌黎 한퇴지韓退之가 덕종德宗‧헌종憲宗 사이에 우뚝이 일어나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 맹가孟軻‧순경荀卿‧가의賈誼‧조조晁錯‧동중서董仲舒‧사마천司馬遷‧유향劉向‧양웅揚雄‧반연班掾 부자父子의 뜻을 찾아 깊이 연구하니, 이때 칭찬하는 이가 반이고 헐뜯는 이가 반이었으나, 유독 유종원柳宗元‧이고李翶‧황보식皇甫湜‧맹교孟郊 등 몇 사람만이 그와 서로 교유交遊하여 깊이 이해하고 독실히 좋아하였을 뿐이었다.
온 세상이 귀머거리뿐인 속에서 홀로 황종黃鍾과 대려大呂를 우렁차게 울리고자 하였기 때문이니, 〈사람들의 인증을 받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또 300년 뒤에 구양수歐陽脩‧소식蘇軾 등이 잇따라 나와서 비로소 〈창려昌黎의 문장文章을〉 칭찬하니, 천하의 문장이 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수隋‧당唐의 문장은 그 병폐가 화려하여 힘이 약한 데 있었을 뿐인데도 한퇴지韓退之가 나와서 이를 만회挽回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는데, 근대의 문장으로 말하면 그 병폐가 남의 것을 표절하여 위조僞造하는 데 있으니, 뜻이 있는 이가 나와서 만회挽回하고자 하여도 힘을 쓰기가 더욱 어렵지 않겠는가?
요컨대 반드시 도道에 뿌리를 두고서 옛 육예六藝의 유지遺旨에 의거하여야 옛 작자作者의 취지趣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漢나라 서경西京 이후로 쇠퇴衰頹한 팔대八代의 문장은 한 사람의 작품作品도 수록하지 않고, 첫머리에 창려昌黎 한문공韓文公 유愈의 문장을 드러내어, 그의 표表‧장狀 9편과, 서書‧계啓‧장狀 46편과 서序 33편과, 기記‧전傳 12편과, 원原‧논論‧의議 10편과, 변辯‧해解‧송頌‧잡저雜著 22편과, 비碑 및 묘지墓誌‧갈명碣銘 52편과, 애사哀詞‧제문祭文‧행장行狀 8편을 수록하고서 정리하여 16권으로 만들었다.
창려昌黎의 기발奇拔함은 비지碑誌에 더욱 재능이 뛰어났으나, 내 생각에 그 문장은 태사太史 사마천司馬遷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 듯하다.
그 이유는 그가 성대한 기세로 탁월한 시문을 짓기 위해 고심하여, 문장이 준엄하기만 하고 성운聲韻의 곡절曲折(高下)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서書‧기記‧서序‧변辯‧해解와 그 밖의 잡저雜著는 한공韓公이 독창獨創한 문호門戶이니 비교하면 달마達摩가 서역西域에서 와서 선문禪門을 독창獨創한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