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過
에 而馬群遂空
하니라 夫冀北馬多天下
하니 伯樂雖善知馬
라도 安能空其群耶
아
伯樂知馬하야 遇其良이면 輒取之하고 群無留良焉하니 苟無良이면 雖謂無馬라도 不爲虛語矣라
大夫烏公以
鎭河陽之三月
에 以石生爲才
라하야 以禮爲
하야 羅而致之幕下
하고
未數月也
에 以溫生爲才
라하야 於是以石生爲
하야 以禮爲羅
하야 又羅而致之幕下
하니라
東都雖信多才士나 朝取一人焉호되 拔其尤하고 暮取一人焉호되 拔其尤하니
自
, 河南尹
으로 以及百司之執事
와 與吾輩
히 政有所不通
하고 事有所可疑
면 奚所諮而處焉
이며
士大夫之去位而巷處者가 誰與嬉遊며 小子後生於何考德而問業焉가
之東西行過是都者
가 無所禮於其
하니 若是而稱曰 大夫烏公一鎭河陽
에 而東都處士之廬虛無人焉
이 豈不可也
리오
相爲天子得人於朝廷하고 將爲天子得文武士於幕下면 求內外無治라도 不可得也리라
愈
라 不能自引去
ㄹ새 러니 今皆爲有力者奪之
하니 其何能無
於懷耶
아
生旣至하야 拜公於軍門커든 其爲吾以前所稱爲天下賀하고 以後所稱爲吾致私怨於盡取也하라
이 首爲四韻詩
하야 歌其事
ㄹ새 愈因推其意而序之
하노라
14. 河陽軍으로 赴任하는 溫處士를 전송한 序
烏公(烏重胤)이 賢士를 얻은 것을 가지고 글을 지었으니, 溫生의 어짊이 저절로 드러났다.
伯樂이 한번 冀州 북쪽의 들판을 지나자 말 떼가 텅 비었다. 冀州 북쪽은 말이 천하의 〈어떤 곳보다〉 많으니, 伯樂이 아무리 말을 잘 알아본다 한들 어찌 〈그 들판에〉 말 떼를 텅 비게 할 수 있겠는가?
解說하는 자가 말하기를 “내가 말한 ‘비었다.’는 것은 말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좋은 말이 없다는 말이다.
伯樂이 말을 잘 알아보아 좋은 말을 만나면 즉시 취하고 말 떼 속에 좋은 말을 남겨두지 않았으니, 만약 좋은 말이 없다면 비록 말이 없다고 해도 빈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東都(洛陽)는 본래 士大夫의 冀北이다. 재능을 자부하면서도 깊이 숨기고서 出仕[市]하지 않는 자로는 洛水 北岸의 石生과 南岸의 溫生이다.
大夫 烏公이 鈇鉞을 가지고 河陽을 鎭守한 지 세 달째 되었을 때 石生을 人才라 하여 禮를 그물로 삼아 石生을 그물질해 잡아 幕下로 데려갔고,
몇 달이 되지 않아 또 溫生을 人才라 하여, 이에 石生을 鳥媒(후림새)로 삼고 禮를 그물로 삼아 또 溫生을 그물질해 잡아 幕下로 데려갔다.
東都에 비록 人才가 많다지만 아침에 한 사람을 취하되 그중에 뛰어난 자를 뽑아 갔고 저녁에 한 사람을 취하되 그중에 뛰어난 자를 뽑아갔다.
그러니 居守(東都留守) 및 河南尹으로부터 各司의 執事(責任者)와 우리 두 縣(洛陽縣과 河南縣)의 大夫(縣令)에 이르기까지 政事에 통하지 않는 바가 있거나 事務에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면 어디에 가서 자문해 처리할 것이며,
벼슬에서 물러나 閭巷(鄕里)에서 지내는 士大夫들이 누구와 더불어 즐겁게 놀 것이며, 小子後生들이 어디에 가서 道德과 學業을 考問(자세히 따져 물음)하겠으며,
東西로 왕래하며 東都를 지나는 搢紳(官員)들이 찾아가서 拜禮할 隱士의 집[廬]이 없으니, 이와 같고 보면 “大夫 烏公이 한번 河陽을 鎭守하자 東都의 處士의 집이 텅 비어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는가?
天子가 南面해 천하를 다스릴 때에 무거운 짐을 맡기고서 힘을 믿을 대상으로는 오직 宰相과 將帥뿐이다.
재상은 천자를 위해 인재를 얻어 조정에 두고, 장수는 천자를 위해 文士와 武士를 얻어 幕下에 둔다면 內外가 다스려지지 않기를 구하여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 매여 있는 몸이라 스스로 몸을 이끌고 떠날 수 없으므로 石生과 溫生 두 분에 依託[資]해 老年을 보내기를 기대하였는데, 지금 두 사람을 모두 힘 있는 분에게 빼앗겼으니, 어찌 마음에 불만이 없겠는가?
溫生이시여!
그곳에 도착한 뒤에 軍門에서 烏公을 拜謁하게 되거든 나를 위해 앞에 한 말로써 천하 사람을 위해 축하하고, 뒤에 한 말로써 나를 위해 인재를 다 취해 간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원망한다는 것을 전하시게나.
留守相公께서 먼저 四韻詩(8句의 詩)를 지어 그 일을 노래하였기에, 나는 이어 相公의 뜻을 미루어 이 序를 짓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