奪所宜處
하야 納之惡地
하야 以枉其材
하니 韋侯將怨且
矣
리라
或曰 不然하다 夫得利則躍躍以喜하고 不利則戚戚以泣하야 若不可生者가 豈韋侯謂哉리오
韋侯讀六藝之文하야 以探周公, 孔子之意하고 又妙能爲辭章하니 可謂儒者라
其翫而忘之以文辭也를 若奏金石以破蟋蟀之鳴과 蟲飛之聲이온 況一不快於考功盛山이 一出入息之間哉아
未幾에 果有以韋侯所爲十二詩遺余者하니라 其意는 方且以入谿谷하야 上巖石하고 追逐雲月不足日爲事라
讀而歌詠之하니 令人欲棄百事往而與之遊하니 不知其出於巴東以屬胊䏰也라
于時應而和者凡十人이러니 及此年하야 韋侯爲中書舍人하야 侍講六經禁中하고
和者通州元司馬爲宰相하고 洋州許使君爲京兆하고 忠州白使君爲中書舍人하고
李使君爲諫議大夫하고 黔府嚴中丞爲秘書監하고 溫司馬爲起居舍人하야 皆集闕下하니라
於是盛山十二詩與其和者가 大行於時하니 聯爲大巻하야 家有之焉하니라
慕而爲者將日益多하니 則分爲別卷하고 韋侯俾余題其首하니라
전반부는 바로 經(날줄)이고, 하반부는 바로 緯(씨줄)이다. 氣勢 또한 跌宕(자유분방)하다.
韋侯가 전에 考功副郞으로 〈外職으로 나가〉 盛山을 맡았을 때에, 사람들이 “위후는 아름다운 선비이고 考功은 중요한 관직이며, 盛山은 궁벽한 郡이다.
그를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서 빼앗아 열악한 곳으로 보내어 그 재능을 펼칠 수 없게 하였으니, 위후는 아마도 원망하고 기뻐하지 않을 것[不釋]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어떤 이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이로운 곳을 얻으면 뛸 듯이 기뻐하고, 이롭지 못한 곳을 얻으면 마치 살지 못할 것처럼 슬퍼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어찌 우리 韋侯에게 해당한 말이겠는가?
위후는 六經의 글을 읽어 周公과 孔子의 뜻을 탐구하고, 또 교묘하게 詩文을 잘 지으니 儒者라고 이를 수 있다.
대체로 儒者는 患難에 대해, 자기가 자초한 것이 아니면 마치 黃河에 제방을 쌓고 屋霤를 막듯이 거부하고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으며,
마치 물이 바다로 흐르고 얼음이 여름 햇볕에 녹듯이 그것을 조용히 소멸시키며,
마치 鐘鼓를 연주해 귀뚜라미와 벌레소리를 깨뜨리듯이 文辭를 감상하며 〈환난을〉 잊는다. 그런데 하물며 考功副郞에서 盛山으로 左遷된 한 번의 불쾌함은 한번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처럼 예사로운 일임에랴?”
얼마 되지 않아 과연 어떤 사람이 나에게 韋侯가 지은 12편의 詩를 보내주었다. 〈그 시를 읽어보니,〉 그의 뜻은 도리어[方且] 溪谷으로 들어가 巖石을 오르고 구름과 달을 쫓아 감상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하였다.
그의 시를 읽고 읊조림에 나로 하여금 모든 일을 버리고 가서 그와 어울려 놀고 싶게 하였으니 그가 이미 巴東을 출발하여 朐䏰에 도착하였는지는 몰랐다.
그때에 應和한 자가 모두 10인이었는데, 금년에 이르러 위후는 中書舍人이 되어 宮中에서 六經을 侍講하고,
화답했던 자 중에 通州 元司馬는 재상이 되고, 洋州 許使君은 京兆尹이 되고, 忠州 白使君은 中書舍人이 되고,
李使君은 諫議大夫가 되고, 黔府의 嚴中丞은 秘書監이 되고, 溫司馬는 起居舍人이 되어, 모두 조정에 모였다.
이때 ≪盛山十二詩≫와 그 詩에 和答한 詩들이 당시에 크게 유행하니, 그 시들을 이어 붙여 긴 詩卷으로 만들어 집집마다 所藏하였다.
이를 흠모하여 뒤이어 和韻한 詩가 날로 더욱 많아지니 分冊해 別卷으로 만들고서, 위후가 나에게 그 책머리에 서문을 쓰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