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大家韓文公文抄 卷10 辯‧解‧說‧頌‧雜著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著 重訂
愈與
書
하야 勸賀擧進士
러니 賀擧進士有名
하니라 毁之曰 賀父名晉肅
이니 賀不擧進士爲是
어늘
勸之擧者爲非라하니 聽者不察也하고 和而唱之하야 同然一辭하니라
라하야늘 釋之者曰 謂若言徵不稱在
하고 言在不稱徵
이 是也
라하니라
이라하야늘 釋之者曰 謂若禹與雨, 丘與蓲之類 是也
라하니라
今賀父名晉肅이니 賀擧進士가 爲犯二名律乎아 爲犯嫌名律乎아
父名晉肅이라하여 子不得擧進士면 若父名仁이면 子不得爲人乎아
夫諱始於何時오 作法制以敎天下者가 非周公, 孔子歟아
하고 하니 此其子宜如何諱
오 將諱其嫌
하야 遂諱其姓乎
아 將不諱其嫌者乎
아
士君子言語行事宜何所法守也아 今考之於經하고 質之於律하며 稽之以國家之典컨대 賀擧進士爲可邪아 爲不可邪아
凡事父母得如曾參이면 可以無譏矣요 作人得如周公, 孔子면 亦可以止矣라
今世之士가 不務行曾參, 周公, 孔子之行하고 而諱親之名은 則務勝於曾參, 周公, 孔子하니 亦見其惑也로다
夫周公, 孔子, 曾參은 卒不可勝이어늘 勝周公, 孔子, 曾參하야 乃比於宦官, 宮妾하니
則是宦官, 宮妾之孝於其親이 賢於周公, 孔子, 曾參者耶아
此文反覆奇險하야 令人眩掉로되 實自顯快라 前分律, 經, 典三段하고 後尾抱前辨難이라
고금 이래로 이런 문장은 흔히 얻을 수 없다.
내가 李賀에게 書信을 보내어 李賀에게 進士試에 應試하도록 권한 일이 있는데, 李賀가 진사시에 응시하여 유명해졌다. 그러자 이하와 명예를 다투는 자가 이하를 헐뜯어 말하기를 “이하의 부친의 이름이 晉肅이니 이하는 진사시에 응시하지 않는 것이 옳은데,
그에게 응시하도록 권한 자의 잘못이다.”라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자들은 자세히 따져보지도 않고 맞장구치며 똑같은 말을 하였다.
이에 皇甫湜이 〈나에게〉 말하기를 “만약 이 일의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가리지 않는다면 선생과 李賀가 장차 죄를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그럴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律(唐律)에 “두 자 이름에 한 글자씩은 避諱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를 해석한 자가 “〈孔子 모친의 이름이 徵在이니〉 徵을 말했으면 在를 말하지 않고, 在를 말했으면 徵을 말하지 않는 것 같은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律에 “이름자와 음이 같은 글자는 避諱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를 해석한 자가 “禹와 雨, 丘와 蓲 같은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하의 부친의 이름이 晉肅이니, 이하가 진사시에 응시한 것이 二名律을 범한 것인가? 嫌名律을 범한 것인가?
부친의 이름이 晉肅이라 하여 아들이 進士試에 응시할 수 없다면, 만약 부친의 이름이 ‘仁’이라면 아들은 ‘人(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避諱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법과 제도를 만들어 천하 사람을 가르치신 분이 周公과 孔子가 아니셨던가?
周公은 詩를 지으면서 피휘하지 않았고, 孔子께서도 두 字 이름 중에 한 자만은 피휘하지 않으셨으며, ≪春秋≫에 嫌名을 피휘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지 않으셨다.
周 康王 釗의 손자가 실로 昭王이니 〈嫌名을 피휘하지 않은 것이고,〉 曾參의 부친의 이름이 ‘晳’이었으되 曾子가 ‘昔’을 피휘하지 않았다.
周나라 때에 〈姓名이〉 騏期란 자가 있었고, 漢나라 때에 杜度란 자가 있었으니, 그 아들들이 어떻게 피휘하는 것이 마땅하였겠는가? 그 혐명을 피휘하려고 드디어 그 姓까지 피휘하였겠는가? 아니면 그 혐명을 피휘하지 않았겠는가?
漢나라는 武帝의 이름인 ‘徹’字를 피휘하여 ‘通’으로 바꾸었으나, 또 車轍의 ‘轍’을 피휘하여 아무 글자로 바꾸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며, 呂后의 이름인 ‘雉’字를 피휘하여 꿩을 ‘野雞’로 바꾸었으나,
또 治天下의 ‘治’자를 아무 글자로 바꾸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며, 現今의 上章과 詔書에도 ‘滸’‧‘勢’‧‘秉’‧‘機’ 등의 글자를 피휘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宦官과 宮妾들만은 도리어 감히 ‘諭’와 ‘機’를 말하지 않으면서 〈이를 말하면〉 ‘觸犯(忌諱에 扺觸됨)’이라 한다.
士君子가 言論과 行事에 있어 무엇을 法으로 삼아 遵守해야 하는가? 지금 經典을 상고해보고 律文을 대조해보고 國家의 典章을 상고해보면 李賀가 進士試에 응시한 것이 옳았는가? 옳지 않았는가?
무릇 부모를 섬김이 曾參과 같을 수 있다면 남의 비난이 없을 수 있고, 사람됨이 周公이나 孔子 같을 수 있다면 또한 頂點[止]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의 선비들은 曾參‧周公‧孔子의 행실은 행하기를 힘쓰지 않으면서, 부모의 이름을 피휘하는 것은 曾參‧周公‧孔子를 초월[勝]하기를 힘쓰니, 또한 저들이 迷惑되었음을 볼 수 있다.
周公‧孔子‧曾參은 끝내 초월할 수 없는데, 〈피휘하는 일은〉 周公‧孔子‧曾參를 초월해 宦官‧宮妾과 같이[比] 하려 하니,
그렇다면 宦官‧宮妾이 그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이 周公‧孔子‧曾參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인가?
이 문장은 〈同一語句를〉 반복적으로 사용한 것이 특이하고 險怪하여 사람들을 어지럽게 할 만하지만 실은 자기 생각을 시원하게 드러낸 것이다. 전반부에 律‧經‧典을 세 단락으로 나누었고, 後尾에 앞에서 辯難한 것들을 뭉뚱그렸다.
단지 세 단락 중에 때로 갑자기 유격군이 출현한 것처럼 점철하니 사람을 昏迷하게 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