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大家韓文公文抄 卷12 碑銘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元和五年
에 天子曰
하야 夸謾兇驕
하야 出不遜言
하니 其執以來
하라
其四月에 中貴人承璀卽誘而縛之하니 其下皆甲以出하야 操兵趨譁어늘
牙門都將烏公重胤이 當軍門叱曰 天子有命하시니 從有賞하고 敢違者斬하리라 於是士皆斂兵還營이어늘 卒致從史京師하니라
壬辰에 詔用烏公爲銀靑光祿大夫河陽軍節度使兼御史大夫하고 封張掖郡開國公하니라
居三年에 河陽稱治하니 詔贈其父工部尙書하고 且曰 其以廟享하라하시니 卽以其年營廟於京師崇化里하니라
軍佐竊議曰 先公旣位常伯이로되 而先夫人無加命하야 號名差卑하니 於配不宜라하다
語聞
에 詔贈先夫人劉氏沛國太夫人
하니라 八年八月
에 廟成
하니 하니라
祀自左領府君而下하고 作主于第하야 乙巳에 升于廟하니라
하고 譜於
하며 列於
하니 在莒者存
과 在齊有餘枝鳴
은 皆爲大夫
요 秦有獲
은 爲大官
이라
其後世之江南者家鄱陽하고 處北者家張掖하며 或入夷狄爲君長하니라
唐初에 察爲左武衛大將軍하니 實張掖人이라 其子曰令望이니 爲左領軍衛大將軍하고
孫曰蒙이니 爲中郞將한대 是生贈尙書諱承玼字某하니라
烏氏自莒齊秦大夫以來로 皆以材力顯이러니 及武德以來로 始以武功爲名將家하니라
開元中
에 尙書管平盧先鋒軍
하야 契丹
하고 從戰捺祿
하야 走
하니라
尙書領所部兵塞其道
하야 하야 綿四百里
히 深高皆三丈
하야 寇不得進
하니 民還其居
하니라
歲罷運錢三千萬餘하니라 黑水室韋以騎五千來屬麾下하니 邊威益張하니라 其後與耿仁智謀하야 說史思明降하니라
思明復叛하니 尙書與兄承恩謀殺之라가 事發族夷하고 尙書獨走免하니라
李光弼以聞하니 詔拜冠軍將軍守右威衛將軍檢校殿中監하고 封昌化郡王石嶺軍使하니라
積粟厲兵하야 出入耕戰타가 以疾去職하니라 貞元十一年二月丁巳에 薨於華陰告平里하니 年若干이라 卽葬于其地하니라
二子라 大夫爲長이요 季曰重元이니 爲某官하다 銘曰
烏氏在唐
하야 有家于初
로다 을 二祖紹居
로다 中郞少卑
하야 屬于尙書
로다
不償其勞
하니 乃相大夫
로다 授我
하야 制有疆墟
하고 하야 以有宗廟
로다
作廟天都
하야 以致其孝
로다 右祖左孫
이 爰饗其報
리라 云誰無子
며 無孫
이리오
克對無羞는
乃惟有人이라
念昔平盧에
爲艱爲瘁라
大夫承之하야
危不棄義라
四方其平
하야 士有
하니 來覲來齋
하야 以饋黍稷
이라
烏氏의 世系와 戰功을 서술한 곳은, 對偶를 피하기 위해 글자를 도치시켜가며 글을 엮었으나[錯綜] 문장이 유창[暢]하다.
元和(唐 憲宗의 연호) 5년(810)에 天子께서 “盧從史가 처음에는 군대를 사용해 恒州의 〈王承宗을 토벌하기를〉 건의하더니, 마침내 은밀히 寇賊(王承宗)과 연합하여 스스로 잘난 체하며 흉악하고 거만하여 불손한 말을 하니, 그자를 잡아 오라.”고 하셨다.
그해 4월에 宦官[中貴人] 承璀가 가서 그를 유인해 잡았다. 그러자 그 부하들이 모두 갑옷을 입고 나와서 무기를 들고 뛰어다니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러자 牙門都將 烏公 重胤이 軍門을 가로막고 큰소리로 꾸짖기를 “天子께서 ‘순종하는 자에겐 賞을 주고 감히 어기는 자는 斬首하라.’고 명하셨다.”고 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무기를 거두고 軍營으로 돌아가니, 마침내 從史를 京師로 押送하였다.
〈원화 5년 4월〉 壬辰日에 皇帝가 詔書를 내려 烏公을 銀靑光祿大夫 河陽軍節度使 兼御史大夫에 임용하고 張掖郡開國公에 封하였다.
절도사로 있은 지 3년에 河陽이 잘 다스려진 것으로 칭송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그의 부친(烏承玼)을 工部尙書에 追贈하셨다. 그리고 또 “廟宇를 세워 享祀하라.”고 하시니, 즉시 그해에 京師의 崇化里에 廟宇를 營建하였다.
軍佐(補佐)들이 사사로이 의논하기를 “先公께서는 이미 常伯(工部尙書)의 位에 오르셨으나, 先夫人께는 贈職이 없어서 號名이 약간 낮으니 配位로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 말이 보고되자, 황제께서 조서를 내려 先夫人 劉氏에게 沛國太夫人을 추증하였다. 원화 8년(813) 8월에 廟宇가 완성되니 三室을 같은 廟宇에 모셨다.
제사는 左領府君으로부터 시작해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지내고, 神主는 府第에서 만들어 乙巳日에 廟宇에 올려 모셨다.
烏氏는 ≪春秋≫에 실려 있고 ≪世本≫에 系譜가 있고 ≪姓苑≫에 列記되어 있는데, 莒나라의 烏存과 齊나라의 烏餘‧烏枝鳴은 모두 大夫였고, 秦나라의 烏獲은 大官을 지냈다.
그 후손으로 江南에 있는 자는 鄱陽에 거주하고, 江北에 있는 자는 張掖에 거주하며, 夷狄의 나라로 들어가서 君長이 된 자도 있다.
唐나라 초기에 烏察이 左武衛大將軍이 되었는데, 실로 張掖 사람이다. 그 아들 烏令望은 左領軍衛大將軍을 지내고,
손자 烏蒙은 中郞將이었는데, 이분이 尙書에 추증된 諱 承玼 字 아무개를 낳았다.
烏氏는 莒‧齊‧秦 세 나라의 大夫가 된 뒤로 모두 材力(능력)으로 顯達했는데, 武德(唐 高宗의 연호) 이후로 武功으로써 名將의 家門이 되기 시작하였다.
開元(唐 玄宗의 연호) 중년에 尙書(烏承玭)가 平盧先鋒軍를 관리하였는데, 奚와 契丹을 연파하고서 捺祿의 전투에 참가하여 可突干을 패주시켰다.
渤海가 海上(해변)에서 소요를 일으켜 馬都山까지 쳐들어오니, 관리와 백성이 모두 도주하여 生業을 잃었다.
그러자 尙書는 휘하부대의 병사를 거느리고서 발해군의 진로를 막으려고 4백 리에 걸쳐 3丈 깊이의 참호를 파고 3장 높이의 堡壘를 쌓아 敵軍이 진입할 수 없게 하니, 백성들이 자기들의 住居로 돌아왔다.
해마다 運送費 3천만 錢을 절감하였다. 黑水와 室韋가 騎兵 5천을 거느리고 와서 麾下에 歸屬하니 邊軍의 위세가 더욱 확장되었다. 그 뒤에 耿仁智와 함께 모의하여 史思明을 설득해 항복시켰다.
사사명이 다시 배반하자, 尙書는 그의 형 烏承恩과 함께 모의하여 그를 살해하려다가 일이 발각되어 가족이 몰살당하고 尙書만이 홀로 도주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李光弼이 이 일을 上奏하니 황제께서 조서를 내려 冠軍將軍 守右威衛將軍 檢校殿中監에 제수하고 昌化郡王 石嶺軍使에 封하셨다.
尙書께서는 군량을 비축하고 兵器를 예리하게 연마하여 나가면 전투하고 들어오면 耕作하다가 질병으로 職에서 물러나셨다. 貞元 11년(795) 2월 丁巳日에 華陰 告平里에서 약간의 年歲로 薨逝하시니, 華陰 땅에 장사하였다.
아들 둘을 두셨는데, 大夫(烏重胤)가 長子이고, 某官 重元이 季子이다. 銘은 다음과 같다.
烏氏는 唐나라에 와서
비로소 명문가로 알려졌네
左武衛大將軍과 左領軍衛大將軍의 관직에
두 할아버님이 서로 이어서 거하셨네
中郞將께선 지위가 좀 낮으셔서
尙書公으로 이어졌네
공로를 보상받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大夫(烏重胤)를 보우하셨네
우리 대부에게 병권을 주시어
강역을 통제하게 하시고
제수가 갖추어지고 禮의 등급도 높아
종묘까지 가지시었네
천자의 도성에 사당을 세워
아들로서의 효도 바치게 하시니
右室의 조부와 左室의 손자가
응당 그 보답을 누리시리라
누군들 아들 없으며
누군들 손자 없으랴
선조를 면대해 부끄럽지 않은 것은
훌륭한 후인이 있어서이지
옛날 平盧軍의 선봉 되셨을 때
참으로 어렵고 고달팠는데
대부가 그 뒤를 이으시어
위급해도 의리 버리지 않으셨지
사방이 평정되어
선비들 안식할 수 있으니
재계하고 찾아와 알현하고서
黍稷을 제물로 올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