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大家韓文公文抄 卷13 墓誌銘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著 重訂
公諱昌裔요 字光後니 本彭城人이라 曾大父諱承慶은 朔州刺史요 大父巨敖는 好讀老子莊周書하야 爲太原晉陽令하니라
再世宦北方일새 樂其土俗하야 遂著籍太原之陽曲하고 曰 自我爲此邑人可也니 何必彭城이리오 父訟은 贈右散騎常侍하니라
公少好學問하야 始爲兒時에 重遲不戲하야 恒若有所思念計畫이라
及壯自試
하야 以開
邊將
이나 하다 入
하야 從道士遊
하다
久之
에 蜀人苦
寇掠
에 公單船往說
하니 琳感欷
하야 雖不卽降
이나 約其徒不得爲虐
하니라
琳降
에 公常隨琳不去
러니 琳死
에 脫身亡
하야 하니라
建中中
에 招起之
하니 爲環檄
에 指摘切刻
하다 納悔恐動心
하니 皆疑惑氣懈
하다 環封奏其本
하니 德宗稱焉
하다
環之會下濮州
하고 戰
하야 救寧陵襄邑
하고 擊
陳州城下
에 公常在軍間
하다
環領陳許軍에 公因爲陳許從事하다 以前後功勞로 累遷檢校兵部郞中御史中丞營田副使하다
所以能擒誅叛將하고 爲抗拒하야 令敵人不得其便하다 圍解에 拜陳州刺史하다
敗
하야 引軍走陳州
하야 求入保
하니 公自城上揖謝全義曰 公受命詣蔡
러니 何爲來陳
가
公無恐하라 賊必不敢至我城下리라 明日에 領步騎十餘하고 扺全義營하니
全義驚喜하야 迎拜歎息하고 殊不敢以不見舍望公하다 改授陳許軍司馬하다
上官說死에 拜金紫光祿大夫檢校工部尙書하야 代說爲節度使하다
命界上吏하야 不得犯蔡州人하고 曰 俱天子人이니 奚爲相傷가
少誠吏有來犯者
어늘 捕得縛送曰
彼人
하니 公宜自治之
하라
少誠慚其軍
하고 亦禁界上暴者
하니 兩界耕桑
이나 吏不
하다 封彭城郡開國公
하고 就拜尙書右僕射
하다
元和七年
에 得疾
하야 視政不時
하다 八年五月
에 하야 過其地
하야 防穿不補
하야 沒邑屋
하고 流殺居人
하다
拜疏請去職卽罪하니 詔還京師하다 卽其日에 與使者俱西하다 大熱이로되 旦暮馳不息하니 疾大發하다
左右手轡止之로되 公不肯曰 吾恐不得生謝天子라하다 上益遣使者勞問하고 勅無亟行하시다
至則不得朝矣라 天子以爲恭이라하야 卽其家拜檢校左僕射右龍武軍統軍知軍事하다
十一月某甲子薨하니 年六十二라 上爲之一日不視朝하고 贈潞州大都督하고 命郞弔其家하다
公不好音聲하고 不大爲居宅하니 於諸帥中獨然이라 夫人은 邠國夫人武功蘇氏라
子四人이라 嗣子光祿主簿縱은 學於樊宗師하니 士大夫多稱之라
長子元一은 朴直忠厚하고 便弓馬하야 爲淮南軍衙門將하다 次子景陽景長은 皆擧進士하다
葬得日하고 相與選使者하야 哭拜階上하야 使來乞銘하다 銘曰
提將之符하고
尸我一方이라
配古侯公하고
維德不爽이라
我銘不亡이면
後人之慶이라
劉昌裔는 사람됨이 뜻이 크고 기개가 높으며 욕심이 없고 마음이 한가로웠는데, 韓文公의 문장 또한 〈유창예의 인품과〉 걸맞다.
公은 諱가 昌裔이고 字가 光後이니 본래 彭城 사람이다. 증조부 諱 承慶은 朔州刺史를 지냈고, 조부 巨敖는 老子와 莊周의 글을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太原府 晉陽縣令을 지냈다.
두 대에 걸쳐 북방에서 벼슬하였기 때문에 그 지방의 풍속을 좋아하여 마침내 太原 陽曲縣에 入籍하고서 “나부터는 이 고을 사람이 되어도 좋으니, 굳이 貫籍을 彭城으로 쓸 것이 뭐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부친 訟은 右散騎常侍에 추증되었다.
公은 少年 때부터 배우고 묻기를 좋아하여, 아이 때부터 행동이 진중하고 느려 장난을 치지 않아, 마치 항상 무엇을 궁리하거나 계획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壯年이 됨에 미쳐 스스로를 시험하기 위해, 吐藩의 땅을 개척하는 것으로 邊將을 설득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三蜀으로 들어가서 道士들과 어울려 지냈다.
얼마 후 蜀人들이 楊子琳의 노략질에 괴로워하자 公이 홀로 배를 타고 가서 양자림을 설득하니, 양자림은 감동해 탄식하여 비록 즉시 항복은 하지 않았으나 그 무리들을 단속해 포악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양자림이 投降한 뒤에 公은 항상 양자림과 어울려 지내며 떠나지 않더니, 양자림이 죽자 공은 몸을 빼내 도망하여 黃河 이북 지역에 出沒하였다.
建中 연간에 曲環이 公을 초빙해 起用하니, 공이 곡환을 위해 李納에게 보내는 檄文을 지었는데, 잘못을 지적하여 꾸짖는 말이 엄하고 각박하였다. 이납이 悔恨과 두려움으로 마음이 흔들리니, 恒州와 魏州가 모두 疑惑(의심을 품음)하여 맥이 풀렸다. 곡환이 그 격문의 稿本을 密封해 上奏하니 德宗께서 칭찬하셨다.
곡환이 다른 군대들와 회합하여 濮州를 함락하고 白塔嶺에서 전투하여 寧陵과 襄邑을 구원하고, 陳州城 아래에서 李希烈을 공격할 때에 公은 항상 곡환의 군중에 있었다.
곡환이 陳許軍을 거느리게 되자 公은 陳許節度使의 從事가 되었다. 전후의 공로로 인해 누차 승진하여 檢校兵部郞中 御史中丞 營田副使가 되었다.
吳少誠이 곡환의 喪中을 틈타 군대를 이끌고 와서 許州城을 공격[叩]하니, 留後 上官說이 공에게 자문하여 城을 死守하였다.
그러므로 叛將을 사로잡아 誅殺하고 항거하여 적이 편리한 기회를 탈 수 없게 하였다. 포위가 풀린 뒤에 陳州刺史에 제수되었다.
韓全義가 敗戰하고서 군대를 이끌고 陳州로 도망해 와서 성안으로 들어가 보전하기를 청하니, 공이 성 위에서 한전의에게 揖하고 사절하기를 “韓公께서는 蔡州로 가라는 皇命을 받으셨는데, 무엇 때문에 陳州로 오셨습니까?
한공께서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적이 감히 나의 성 아래까지 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서 이튿날 步兵과 騎兵 10여 명을 거느리고서 한전의의 군영으로 가니,
한전의는 놀라고 기뻐하여 나아가서 劉公을 맞이해 절하고 탄식하였고, 감히 성안으로 들이어 머물게 하지 않았다 하여 劉公을 원망하지 않았다. 다시 陳許軍司馬에 제수되었다.
上官說이 죽자, 公은 金紫光祿大夫 檢校工部尙書에 제수되어 上官說을 대신해 陳州節度使가 되었다.
공은 界上(邊境)의 관리들에게 명하여 蔡州의 인민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면서 “모두 천자의 인민인데, 무엇 때문에 서로 해칠 필요가 있느냐?”라고 하였다.
吳少誠의 官吏 중에 와서 침범하는 자가 있자, 체포해서 결박해 蔡州로 보내면서 말하기를 “저자가 그곳 사람이라고 詐稱[妄稱]하니 吳公께서 스스로 처리하심이 마땅하겠기에 〈잡아 보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吳少誠은 자기의 군대를 부끄러워하였고 또한 界上에서 노략질하는 것을 금지하니, 두 州의 邊界에 耕地와 桑田이 맞닿아 있었으나 관리들이 責問[何問]하지 않았다. 彭城郡開國公에 봉해지고 尙書右僕射에 제수되었다.
元和 7년(812)에 병을 얻어 제때에 정사를 살피지 못하였다. 元和 8년(813) 5월에 他地에 발생한 홍수가 劉公의 管內를 지나면서 제방을 뚫었는데도 미처 보수하지 못하여 城邑의 民家들은 물속에 잠기고 사람들은 急流에 쓸려 죽었다.
이에 劉公이 疏를 올려 관직에서 물러나 죄를 받기를 청하니, 황제께서 조서를 내려 京師로 돌아오라고 명하셨다. 공은 그날로 使者와 함께 서쪽을 향해 출발하였다. 이때는 크게 더운 철인데도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쉬지 않고 달리다 보니 병이 크게 났다.
左右(侍從)가 손으로 고삐를 잡고 말을 멈추게 하려 하였으나, 공이 동의하지 않으면서 “나는 살아서 천자께 사죄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皇上께서 다시 사자를 보내어 위문하시고, 유공에게 “너무 급히 오지 말라.”고 명하셨다.
유공이 경사에 도착해보니, 그 증상이 이미 천자를 알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천자께서는 그를 공경스럽다고 여겨, 〈사람을 보내〉 공의 집으로 가서 檢校左僕射 右龍武軍統軍知軍事에 제수하게 하셨다.
11월 아무 甲子에 薨逝하니 향년이 62세셨다. 황상께서는 그를 위해 하루 동안 조화를 보지 않으시고서 공을 潞州大都督에 追贈하고 郞中에게 명하여 그의 집으로 가서 弔喪하게 하셨다.
이듬해 아무 달 아무 날에 河南府 아무 縣 아무 鄕 아무 언덕에 장사 지냈다.
公은 음악을 좋아하지 않고 주택을 거대하게 建造하지 않았으니 여러 節度使 중에 유독 공만이 그러하였다. 夫人은 邠國夫人 武功 蘇氏이다.
네 아들을 두었는데, 嗣子 光祿主簿 縱은 樊宗師에게 배웠는데, 많은 士大夫들이 그를 칭송한다.
長子 元一은 樸實하고 忠厚하며 弓馬에 익숙하여 淮南軍衙門將이 되었다. 次子 景陽과 景長은 모두 貢擧로 천거되어 進士試에 참가하였다.
葬日을 정하고서 〈유공의 아들들이〉 함께 使者를 선발한 뒤에 섬돌 위에서 哭하며 절하고서 나에게 사자를 보내어 와서 墓誌銘을 청하였다. 銘은 다음과 같다.
장수의 符節 가지고 와서
우리 지방을 다스리셨네
지위는 옛날의 제후와 대등하고
도덕 또한 어긋나지 않았네
나의 銘文 소멸되지 않는다면
후손들의 복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