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諱群
이요 字弘之
니 世爲滎陽人
이라 其祖於
時
에 有
襄城公者
하야 子孫因稱以自別
하니라
曾祖匡時는 晉州霍邑令이라 祖千尋은 彭州九隴丞이라
父迪은 鄂州唐年令한대 娶河南獨孤氏女하야 生二子하니 君其季也라
以進士選吏部考功所
爲上等
하야 授正字
하다 自鄠縣尉拜監察御史
하야 佐鄂岳使
하다
에 以殿中侍御史佐其軍
하니라 均之徵也
에 遷虞部員外郞
하다
均鎭襄陽
에 復以君爲襄府左司馬刑部員外郞
하야 事
하니라
均卒하고 李夷簡代之에 因以故職留君하다 歲餘에 拜復州刺史라가 遷祠部郞中하다
會衢州無刺史
하야 方選人
에 君願行
하니 宰相卽以君
하다
治衢五年에 復入爲庫部郞中이러니 行及揚州遇疾하야 居月餘에 以長慶元年八月二十四日卒하니 春秋六十이라
卽以其年十一月二十二日從葬于鄭州廣武原先人之墓次하다
君天性和樂
하야 居家事人
과 與待交遊
에 初持一心
을 也
하다
하고 亦不爲
之行
하니라 俸祿入門
이면 與其所
吹笙彈箏
하며
飮酒舞歌
하고 醉呼
하야 連日夜
하고 費盡不復顧問
하며 라도 一無所愛惜
하고 不爲後日毫髮計留也
하니라
遇其空無時하야 客至면 淸坐相看하고 或竟日不能設食하야 客主各自引退라도 亦不爲辭謝하니라
與之遊者가 自少及老히 未嘗見其言色有若憂歎者하니 豈列禦寇莊周等所謂近於道者邪아
其治官守身
에 又極謹愼
하야 하니라 去官而人民思之
하고 身死而親故無所怨議
하야 哭之皆哀
하니 也
로다
初娶吏部侍郞京兆韋肇女니 生二女一男한대 長女嫁京兆韋詞하고 次嫁蘭陵蕭儹하니라
後娶河南少尹趙郡李則女니 生一女二男하니라 其餘男二人女四人皆幼하니라 嗣子退思는 韋氏生也라 銘曰
以文進塗闢
하야 治藹厥蹟
이라 愈著白
하고 이러니 이라
鄭君은 諱가 群이고 字가 弘之이니, 대대로 〈滎陽에 살아〉 형양 사람이 되었다. 그 조상 중에 元魏(北魏) 때에 襄城公에 假封된 분이 있어서, 자손들이 이를 본관으로 칭하여 다른 鄭氏와 구별하였다.
曾祖 鄭匡時는 晉州 霍邑縣令을 지냈고, 祖父 鄭千尋은 彭州 九隴縣丞을 지냈다.
父親 鄭迪은 鄂州 唐年縣令을 지냈는데, 河南 獨孤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니, 정군은 작은 아들이다.
鄭君은 進士로서 吏部의 考功郞中이 실시한 試判에 上等으로 뽑혀 正字에 제수되었다. 鄠縣의 縣尉로서 監察御史에 제수되어 鄂岳節度使를 보좌하였다.
裴均이 江陵尹이 되었을 때 정군은 殿中侍御史로 江陵節度使를 보좌하였다. 배균이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들어갔을 때에 정군도 함께 올라가서〉 虞部員外郞으로 승진하였다.
배균이 襄陽을 鎭守하게 되자, 다시 정군을 襄陽府左司馬 刑部員外郞으로 삼아 支度使의 일을 보좌[副]하게 하였다.
배균이 卒하고 李夷簡이 後任으로 와서는 정군을 그대로 故職(원래의 직책)에 임명하고서 계속 머물게 하였다. 1년여 뒤에 復州刺史에 제수되었다가 祠部郞中으로 승진하였다.
마침 이때 衢州에 刺史 자리가 비어 사람을 고르는 중이었는데 정군이 그곳 자사로 가기를 원하니, 宰相이 즉시 정군으로 應詔하였다.
구주를 다스린 지 5년 만에 다시 內職인 庫部郞中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京師를 향해 가다가 揚州에 미쳐 병에 걸려 한 달 남짓 머물다가, 長慶 원년(821) 8월 24일에 卒하니 春秋가 60세였다.
곧 그해 11월 22일에 鄭州 廣武原에 있는 先人의 묘역에 장사 지냈다.
鄭君은 천성이 화목하고 안락하여 집에 있을 때나 사람을 섬길 때나 벗을 상대할 때나 처음에 한번 마음을 먹으면 緩急‧曲直‧薄厚‧疎數하는 바가 있다 하여 평소의 마음을 바꾼 적이 없었다.
권세에 영합하지도 않았고 또 모나게 행동하여 남들이 접근하기 어렵게 하지도 않았다. 俸祿이 대문 안으로 들어오면 벗들과 생황을 불고 箏을 타며,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익살을 떨고 술에 취해 고함을 치면서 밤낮을 계속해 놀고도 만족해하지 않았고 돈이 다 떨어지면 다시 묻지 않았으며, 혹 어떤 자가 돈을 나누어 가지고 가도 조금도 애석해함이 없었고, 후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남겨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돈이 다 떨어져서 아무것도 없을 때에 客이 오면 조용히 앉아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고, 혹 종일토록 밥을 차릴 수 없어 客과 主人이 각각 물러갈 경우에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와 교유하던 자들은 젊은이부터 늙은이까지 그의 말과 안색에 근심하거나 탄식하는 기색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어찌 列禦寇(列子)와 莊周(莊子) 등이 말한 ‘道에 근접한 자’가 아니겠는가?
그는 官府의 일을 다스리고 몸을 지킴에 더욱 지극히 근신하여 과오가 없었다. 관직에서 떠났으되 人民들은 그를 그리워하고, 몸이 죽었으되 친구들은 그를 원망하거나 비방하지 않고서 모두 슬프게 통곡하였으니, 더욱 존경해 높일 만하다.
初娶는 吏部侍郞 京兆 韋肇의 딸로 2女 1男을 낳았는데, 長女는 京兆 韋詞에게 출가하고, 次女는 蘭陵 蕭儹에게 출가하였다.
後娶는 河南少尹 趙郡 李則의 딸로 1女 2男을 낳았다. 그 밖에 아들 둘과 딸 넷은 모두 어리다. 嗣子 鄭退思는 韋氏 소생이다. 銘은 다음과 같다.
두 번 급제하여 문장으로 벼슬길 열고서
세 절도부 보좌해 다스린 공적 성대하였네
郞官으로 郡守 되어 치적 더욱 드러났고
깨끗한 璞玉처럼 결점 하나 없더니
甲年이 한 번 끝나자 무덤으로 돌아갔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