按田弘正本傳
컨대 世多臣順大節
이나 昌黎公特
其以六州還朝廷一事
하고 而頌美之詞特詳銘中
하니 甚得體
라
元和八年十一月壬子에 上命丞相元衡, 丞相吉甫, 丞相絳하야 召太史 尙書比部郞中韓愈至政事堂하고
傳詔曰 田弘正始有廟京師하니 朕惟弘正先祖父는 厥心靡不嚮帝室이나 訖不得施일새 乃以敎付厥子하니라
維弘正銜訓事嗣를 朝夕不怠일새 以能迎天之休하야 顯有丕功하니라
維父子繼忠孝하니 予維寵嘉之하노라 是以命汝愈銘하노니 欽哉하라
惟時臣愈承命悸恐
이라 明日詣
하야 拜疏辭謝
나 하다
退
하야 伏念昔者魯僖公
이 能遵其祖
하니 周天子實命其史臣克
하야 作爲
之詩
하야 使聲于其廟
하야 以假魯靈
하니라
今天子嘉田侯服父訓不違
하야 用康靖我國家
하니 蓋寵銘之
는 所以
田氏之祖考
라
謹案 魏博節度使, 銀靑光祿大夫, 檢校工部尙書, 兼魏州大都督府長史, 御史大夫, 沂國公田弘正은 北平盧龍人이라
故爲
하야 忠孝畏愼
하니라 에 其子幼弱
이로되 하니
弘正籍其軍之衆과 與六州之人하야 還之朝廷하고 悉除河北故事하야 比諸州라 故得用爲帥하니라
已而
요 復贈其父故滄
刺史兵部尙書
하고 母夫人鄭氏梁國太夫人
하니라
得立廟祭三代
하니 曾祖都水使者府君
은 祭初室
하고 祖安東司馬贈襄州刺史府君
은 祭二室
하고 兵部府君
은 祭東
하니라 其銘曰
唐繼古帝
하니 海外受制
라 하야 以驚
하니 群黨
하야 河北失平
이라
號登元和
하야 하야 하니 咸順指令
이라 魏土
에 戲兵
하니 吏戎
하야
莫保腰頸
이라 人曰田侯
는 其德可倚
라하야 叫譟奔趨
하야 하니
田侯攝事
하야 奉我
이라 束縛弓戈
하고 이라 提壃籍戶
하야 來復
이라
帝欽良臣하사
曰維錫予라
嗟我六州가
始復故初로다
告慶于宗하고
以降命書
호되 하고 豹尾神旗
와 櫜兜戟纛
하고 以長魏師
하라하시니
田侯稽首하야
臣愚不肖나
迨玆有成은
祖考之敎로이다
帝曰兪哉
라 維汝
孝
하니 予思乃父
하야 追秩夏卿
하고 嫓德娠賢
하니 梁國是榮
하노라
田侯作廟
에 相方視阯
하고 見于蓍龜
하니 祖考咸喜
라 田侯
여 兩有文武
하니 訖其外庸
이면 可作
로다
咨汝田侯여
勿亟勿遲하고
覲饗式時하야
爾祖爾思하라
〈≪舊唐書≫와 ≪新唐書≫에 실린〉 田弘正의 本傳을 상고하면 세상에서는 그가 신하로서 큰 절개를 지킨 것을 대단하게 여겼으나, 昌黎公은 특별히 그가 여섯 개의 州를 가지고 조정에 귀순한 한 가지 일을 기록한 부분을 고쳐 쓰고서, 찬미하는 말을 특별히 銘文 안에 자세히 말하였으니 銘의 체제에 매우 부합한다.
元和 8년(813) 11월 壬子日에 황제께서 丞相 武元衡, 丞相 李吉甫, 丞相 李絳에게 명하여 太史와 尙書比部郞中 韓愈를 政事堂으로 불러,
다음과 같은 詔書를 전하셨다. “田弘正은 처음부터 家廟가 京師에 있었다. 朕이 생각건대 전홍정의 조부와 부친은 그 마음이 조정을 향해 있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끝내 그 마음을 실현하지 못하였기에, 이에 그 자손에게 유언을 남겼다.
전홍정은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銜] 家業을 계승하는 일을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하늘이 내린 복을 받아 드러나게 큰 공을 세웠다.
저들 父子가 서로 이어 충성하고 효도하였으니 나는 저들을 가상히 여긴다. 그러므로 너 한유에게 명하여 碑銘을 짓게 하니, 삼갈지어다.”
이때 臣 韓愈는 명을 받들고 두렵고 불안하였다. 그래서 이튿날 東上閤門으로 가서 疏를 올려 사절하였으나 황제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다.
물러나와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 魯 僖公이 그 先祖 伯禽의 功業[烈]을 준수하니, 周나라 天子께서 그 史臣 史克에게 명하여 〈駉〉‧〈有駜〉‧〈泮水〉‧〈閟宮〉 등의 詩를 짓게 하여 〈魯나라에 주어〉 그 종묘에서 노래하여 魯나라 先君들의 魂靈을 오게 하였다.
지금 천자께서 田侯(田弘正)가 부친의 遺訓을 실행[服]하고 어기지 않음으로써 우리 국가를 편안하게 한 것을 가상하게 여기셨으니, 대체로 恩寵을 내려 碑銘을 짓게 하신 것은 田氏의 祖考를 慰安하기 위함이시다.
그런데 臣이 마침 史筆을 잡고 史館에 속한 史官으로서 皇上의 명을 받았으니, 어찌 사절할 수 있겠는가?
삼가 고찰하건대, 魏博節度使 銀靑光祿大夫 檢校工部尙書 兼魏州大都督府長史 御史大夫 沂國公 田弘正은 北平 盧龍 사람이다.
옛 위박절도사 휘하의 장군으로 충성하고 효도하며 모든 일에 조심하고 삼갔다. 田季安이 죽었을 때에 그 아들이 어렸는데도 〈職位를 世襲하는〉 종전의 관례[故事]에 따라 그 부친을 대신하니,
인민과 관리들이 복종하지 않고 田弘正의 집으로 와서 그를 맞이해 가서 軍務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러자 전홍정은 그 군대의 숫자와 여섯 州의 인민을 장부에 기록하여 朝廷에 귀속시키고, 河北에 〈직위를 세습하던〉 종전의 관례를 다 없애고서 다른 州와 같이 〈조정의 임명을 받게〉 하였다. 그러므로 전홍정이 魏博節度使에 임명된 것이다.
이윽고 조정에서 다시 그 부친인 옛 滄州刺史를 兵部尙書에, 母夫人 鄭氏를 梁國太夫人에 추증하였다.
廟宇를 세워 3代를 제사 지냈는데, 曾祖 都水使者 府君은 1室에서 제사하고, 祖考 安東司馬 贈襄州刺史 부군은 2室에서 제사하고, 兵部 부군은 東室에서 제사하였다. 銘은 다음과 같다.
唐나라가 옛 제왕의 일 계승하니
바다 밖 나라들도 통제받았네
오랜 태평에 젖어 있다가
燕 땅의 도적에 크게 놀랐네
반역의 도당들 서로 연결해
河北의 평화를 잃게 하였네
元和 연간에 이르러
큰 성인께서 나라 경영하시어
바람 일고 햇볕 비추니
모두 명령에 순종하였네
산 높고 땅 넓은 魏州에서
어린아이가 병권을 희롱하니
관리와 군사들 괴로워하고 원한 품었네
목숨 부지 못할까 봐
사람들 말하네 田侯는
그 덕이 의지할 만하다고
떠들어대며 달려가서
그의 집 문 앞에서 일어나기 청하였네
전후가 일을 맡자
우리 황제의 명 받들어
무기를 묶어두고
예의의 준칙 고찰하였네
관할하는 지역의 戶籍 가지고
와서 국가의 상법 회복하였네
황제께서 어진 신하 존중하시어
그대에게 상을 준다고 말씀하셨네
아 우리 여섯 개의 州들이
비로소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경사를 宗廟에 고하고서
조서를 내리시되
“
旌과
節은 포대에 넣어 간직하고
표범 꼬리로 장식한 장군의 깃발과
활집과 투구 창과 큰 기를 세우고
가서
魏博 군대를 통솔하라” 하셨네
節
전후는 머리 조아리며 아뢰기를
“신은 어리석고 불초하오나
지금 성취한 것은
父祖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하니
황제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는 충신이고 효자이니
내 너의 아비를 생각하여
兵部尙書에 추증하고
너의 어미는 有德者의 아내 되어 어진 아들 낳았으니
梁國夫人에 봉하여 영예롭게 하노라”
전후가 廟宇를 세울 적에
방위를 보고 터를 살펴
시초점 치고 거북점 치니
조상님들 다 기뻐하신다 하네
과감하고 굳센 전후시여
文德과 武略을 겸비하였으니
지방관의 임기를 마치신 뒤에는
황제의 보좌 되시리라
아 그대 전후시여
서둘지도 말고 늦추지도 말고
적당한 때에 가서 제사 올리고서
그대의 조상님들 생각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