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元十八年十月十一日에 太學博士施先生士丐卒하니 其寮太原郭伉買石誌其墓하고 昌黎韓愈爲之辭曰
先生明
하고 通春秋左氏傳
하야 善講說
하니 朝之賢士大夫
에 從而執經
者繼于門
하니라
太學生習毛鄭詩春秋左氏傳者
는 皆其弟子
라 之子弟
가 先生之說二經
하야 來太學
坐諸生下
하야 恐不卒得聞
하니라
故自賢士大夫
新進小生
히 聞先生之死
하고 哭泣相弔
하며 歸衣服貨財
하니라
先生年六十九니 在太學者十九年이라 由四門助敎爲太學助敎하고 由助敎爲博士하니라
太學
當去
로되 諸生輙拜疏乞留
하니 或留或遷
하야 凡十九年
에 不離太學
하니라
祖曰旭이니 袁州宜春尉요 父曰婼이니 豪州定遠丞이라 妻曰太原王氏니 先先生卒하니라
子曰友直
은 明州鄮縣主簿
요 曰友諒
은 太廟齋郞
이라 曰
先生之祖
는 氏自
라 其後施
이 事孔子以彰
하니라 하고 하니라 太尉之孫
이 始爲吳人
하니라
이 亦載其跡
이라 先生之興
은 是召
라 纂序前聞
하니 于光有曜
라
古聖人言
은 其旨密微
어늘 箋注
하야 顚倒是非
라 聞先生講論
이면 如客得歸
리라
卑讓
하고 出言
이라 今其死矣
니 誰嗣爲宗
가 縣曰萬年
이요 原曰神禾
라 者
가 先生墓耶
아
墓誌에 유독 施先生이 경서를 강설한 것과 太學에서 거쳤던 관직의 本末만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銘文 또한 聲韻의 曲折이 뛰어나다.
貞元 18년(802) 10월 11일에 太學博士 施士丐 선생이 卒하시니, 그 同僚 太原 郭伉이 비석을 사서 〈그의 일생을 기록해〉 무덤 앞에 세우고, 昌黎 韓愈가 그를 위해 墓誌銘을 지었다.
先生은 ≪毛鄭詩(詩經)≫에 밝고 ≪春秋左氏傳≫에 정통하여 講說을 잘하였으니 조정의 어진 士大夫 중에 손에 經을 들고 考疑하기 위해 찾아가는 자들이 문에 줄을 이었다.
太學生 중에 ≪毛鄭詩≫와 ≪春秋左氏傳≫을 학습한 자들은 모두 施先生의 제자이다. 貴遊家의 子弟들도 先生이 두 經을 講說할 때를 기다려[時] 太學으로 와서 諸生들의 뒤에 공손히 앉아서 講說을 끝까지 듣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先生이 逝去하자 두 經을 배우는 學生들은 스승을 잃었고, 태학의 職任을 맡은 이들은 벗을 잃었다.
그러므로 어진 士大夫나 老師宿儒로부터 新進小生에 이르기까지 先生의 사망을 듣고는 모두 哭泣하며 弔喪하고 衣服과 재물을 보냈다.
先生은 향년이 69세이니, 太學에 재직한 기간이 19년이다. 四門助敎로부터 太學助敎가 되고 太學助敎로부터 太學博士가 되었다.
太學에 있을 때에 任期가 만료되면 응당 규정에 따라 떠나야 한다. 그러나 諸生들이 번번이 上疏해 留任시키기를 청원하였으므로 유임되기도 하고 승진되기도 하여 모두 19년 동안 太學을 떠나지 않았다.
祖父 旭은 袁州 宜春縣尉를 지냈고, 父親 婼은 豪州 定遠縣丞을 지냈다. 아내는 太原 王氏인데, 선생보다 먼저 죽었다.
아들 友直은 明州 鄮縣主簿이고 友諒은 太廟齋郞이다. 銘[系]은 다음과 같다.
선생의 祖先은
氏가 施父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뒤에 施常이
孔子를 섬겨 명성이 드러났다
施讐는 博士가 되고
施延은 太尉가 되었다
太尉의 손자가
비로소 吳나라 사람이 되었다
朱然과 朱續은
사적이 史傳에 실려 있다
先生이 起用된 것은
公車의 부름을 받아서였다
전인의 說들을 모아 敍述하니
빛이 더욱 드러났다
옛 성인의 말씀은
그 뜻이 깊고 은미한데
箋注가 어지럽게 나열되어
是非가 전도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강론을 들으면
마치 나그네가 〈길을 헤매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선생은 겸손하고 사양하는 마음 진지하고
말을 하면 소리가 매우 컸는데
이제 선생이 사망하셨으니
누가 선생을 이어 宗匠이 될 것인가
萬年縣
神禾原에
높이 네 자 되는 무덤이
선생의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