予覽昌黎碑柳州하니 不書柳州德政之可載하고 載其死而爲神一節하니 似狎而少莊이라
羅池廟者
는 故刺史
廟也
라 柳侯爲州
에 不鄙夷其民
하고 動以禮法
하니
三年
에 民各自矜奮
玆土雖遠京師
나 吾等亦天氓
이라 今天幸惠仁侯
하시니 若不化服
이면 我則非人
이라 於是老少相敎語
하야 莫違侯令
하니라
凡有所爲於其鄕閭及於其家에 皆曰 吾侯聞之면 得無不可於意否아하고 莫不忖度而後從事하니라
凡令之期를 民勸趨之하야 無有後先하고 必以其時하니라
於是民業有經
하고 公無
하며 流逋四歸
하야 樂生興事
하니 宅有新屋
하고 有新船
하며 池園潔修
하고 豬牛鴨鷄肥大蕃息
하니라
하고 婦順夫指
하며 嫁娶葬送
에 各有條法
하며 出相弟長
하고 入相慈孝
하니라
先時民貧
하야 以
하야 久不得贖
하면 盡沒爲隷
러니 我侯之至
에 按國之故
하야 하고 하며
大修孔子廟하고 城郭巷道를 皆治使端正하고 樹以名木하니 柳民旣皆悅喜하니라
嘗與其部將魏忠謝寧歐陽翼과 飮酒驛亭에 謂曰 吾棄於時而寄於此하야 與若等好也라
明年에 吾將死요 死而爲神하리니 後三年에 爲廟祀我하라하더니 及期而死하니라
에 侯降于州之後堂
하니 歐陽翼等見而拜之
하니라 其夕
에 夢翼而告曰 館我于羅池
하라하니라
其月
에 廟成
하야 大祭
할새 過客李儀醉酒
하야 慢侮堂上
타가 得疾
하야 扶出廟門卽死
하니라
明年春에 魏忠歐陽翼이 使謝寧來京師하야 請書其事于石하니라
余謂柳侯生能澤其民하고 死能驚動福禍之하야 以食其土하니 可謂靈也已로다
作迎享送神詩遺柳民하야 俾歌以祀焉하고 而幷刻之하노라
柳侯는 河東人이니 諱宗元이요 字子厚라 賢而有文章하야 嘗位於朝하야 光顯矣러니 已而擯不用하니라
待侯不來兮
여 不知我悲
로다 侯乘
兮入廟
하야 慰我民兮不嚬以笑
라 에 로다
侯朝出遊兮暮來歸
하고 春與猨吟兮
로다 兮爲侯是非
하니 千秋萬歲兮侯
하고 福我兮壽我
하며
내(
茅坤)가
昌黎가 지은
柳州의
碑文을 보니, 기재할 만한 유주의
德政은 기재하지 않고, 그가 죽어서
神이 된 한 대목만을 기재하였으니, 무람없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莊重하다.
柳宗元石刻像
羅池廟는 옛
刺史 柳侯의 사당이다. 유후는
柳州를 다스릴 적에 유주 백성들을
邊鄙의
蠻夷라 하여
輕視하지 않고 항상[
動] 예의와 법도로써 대하니,
重修羅池廟記
3년 만에 백성들이 각자 분발해 말하기를 “이곳이 비록 京師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우리도 하늘이 낸 백성이다. 지금 다행히 하늘이 우리에게 어진 유후를 보내주셨으니, 우리가 만약 感化하여 복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다.”라고 하고서, 이에 늙은이와 젊은이가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여 유후의 명을 어기지 않았다.
백성들이 자기들 마을이나 자기들 집에 할 일이 있으면 모두 말하기를 “우리 유후께서 들으시면 어찌[得] 마음속으로 옳지 않다고 여기지 않으시겠는가?” 하고서, 먼저 헤아린 뒤에 그 일을 실행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官府에서 명령해 정한 기한을 백성들이 노력해 맞추어 늦지도 않고 이르지도 않고 반드시 그 시기에 시행하였다.
이에 백성들에겐 일정한 生業이 있고, 관부에는 징수하지 못한 租稅가 없으며, 도망갔던 유민이 사방에서 돌아와 생업을 즐기고 사업을 일으키니, 마을에는 새로 지은 집이 있고 부두에는 새로 만든 배가 있으며, 연못과 동산이 정결하고 돼지와 소, 오리와 닭이 비대하고 번식하였다.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고 아내는 남편의 뜻에 순종하며, 嫁女와 娶婦, 下葬과 送殯에 각각 조리와 법도가 있으며, 나가면 벗들과 우애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들어오면 자식을 사랑하고 어버이께 효도하였다.
이전에는 백성이 가난하여 아들이나 딸을 담보로 잡히고서 오래도록 상환하지 못하면 모두 몰수해 노비로 삼았는데, 우리 柳侯가 부임하여서는 국가의 옛법을 따라 그동안의 품삯으로 본전을 제하고 담보로 잡힌 자식을 모두 빼앗아 그 부모에게 돌려주었으며,
대대적으로 孔子廟를 수리하고 내성과 외곽, 골목길과 큰길을 모두 정비하여 단정하게 꾸미고 진귀한 나무를 심으니 유주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柳侯가 일찍이 그 部將 魏忠‧謝寧‧歐陽翼과 함께 驛亭에서 술을 마실 적에 이르기를 “나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이곳에 寄留하면서 너희들과 잘 지내고 있다.
명년이면 나는 죽을 것이고, 죽으면 神이 될 것이니, 3년 뒤에 사당을 지어 나를 제사하라.”고 하였는데, 그 시기가 되자 과연 죽었다.
죽은 지 3년이 되던 해 7월[孟秋] 辛卯日에 유후의 神靈이 柳州刺史府의 後堂에 降臨하니 歐陽翼 등이 뵙고서 절을 하였다. 그날 밤에 歐陽翼의 꿈에 나타나 이르기를 “羅池에 館을 세워 나를 머물게 하라.”고 하였다.
그달 丙辰日에 사당을 落成하고서 크게 제사를 지낼 적에 過客 李儀가 술에 취해 堂上에서 유후를 모욕했다가 병을 얻어 부축해 사당 문을 나와 즉사하였다.
이듬해 봄에 魏忠과 歐陽翼이 謝寧을 京師로 보내어, 나에게 그 일을 비석에 기재하기를 청하였다.
나는 “유후가 살아서는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혔고, 죽어서는 백성들을 禍福으로 驚動시켜 그곳에서 제사를 받아먹으니, 신령스럽다고 할 만하다.”고 하고서,
神을 맞이해 祭享할 때와 보낼 때에 노래할 詩를 지어 유주 백성들에게 주어, 노래하며 제사하게 하고 아울러 비석에 새기게 하노라.
柳侯는 河東 사람으로 諱는 宗元이고 字는 子厚이다. 어질고 문장이 있어서 일찍이 朝廷에서 관직을 맡아 영화롭고 현달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버림을 받고 쓰이지 못하였다.
그
辭는 다음과 같다.
붉은
荔枝와 노란
香蕉각종
魚肉과 채소를
柳侯의 사당에 올리네
유후 맞이할 배에 두 개의
旗 세우고서
中流를 건너자 바람에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정박하였네
荔枝
유후를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우리의 슬픔을 모르는가 보다
유후께서 망아지 타고 사당으로 들어와서
우리 백성들 위로하여 찌푸리지 않고 웃게 하였네
鵝山과 柳水에는
계수나무 무성하고 흰 돌들 가지런히 놓여 있네
유후께선 아침에 나가 놀다가 저녁에 돌아오시고
봄에는 원숭이랑 시를 읊고 가을에는 학과 함께 날아다니네
북방 사람들 유후를 是非하니
천만세토록 우리 곁을 떠나지 말고
우리에게 복을 주고 우리를 장수하게 하시며
厲鬼를 쫓아 산 왼쪽으로 몰아내고
낮은 지대는 습하지 않고 높은 지대는 마르지 않게 하여
메벼며 찰벼가 충족하여 여유가 있고 뱀들 똬리 틀게 하소서
우리 백성들 보답하는 제사를 게을리하지 않고
오늘부터 시작해 대대로 공경해 받드오리다
荔子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