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諱啓요 字某니 河南人이라 其大王父融이요 王父琯이니 仍父子爲宰相이라
融相天后하니 事遠不大傳하니라 琯相玄宗肅宗하야 處艱難中에도 與道進退하고
薨贈太尉하야 流聲于玆하니라 父乘은 仕至祕書少監하고 贈太子詹事하니라
始爲鳳翔府參軍에 尙少로되 人吏迎觀望見하고 咸曰 眞房太尉家子孫也라하야 不敢弄以事하니라
轉同州澄城丞
하야 益自飾理
하니 同官憚伏
하니라 에 求佐得公
하야 擢摘良姦
하니 南
大喜
하니라
還進昭應主簿
하니라 에 表公爲佐
하고 拜監察御史
하니 部無遺事
하니라
冑遷江西
하고 又以節鎭江陵
에 公一隨遷佐冑
하니 累功進至刑部員外郞
하야 賜五品服
하고 副冑使事爲
하니라
上聞其名
하고 徵拜虞部員外
하니라 在省籍籍
러니 遷萬年令
에 하니라
貞元末
에 에 材公之爲
하야 하고 拜御史中丞
하야 이요 管有嶺外
之地
하니라
削衣貶食
하며 하고 以班親舊朋友爲義
하니라 在容九年
타가 하고 封淸河郡公
하니 食邑三千戶
라
에 應待失禮
하야 客主違言
하니 徵貳太僕
하니라 未至
에 貶虔州長史
하고 而
하니라
以疾卒官
하니 年五十九
라 其子越
이 能輯父事無失
하야 하니라 旣葬
에 碣墓請銘
이어늘 銘曰
房氏二相
하니 厥家以聞
이라 이온 가 公初爲吏
도 亦以
라
에 乃始已致
라 旣辦萬年
에 命屛容服
이라 功緖卓殊
하니 이라
維不順隨라가
失署亡資라
非公之怨이라
銘以著之하노라
솔직하게 서술하였다. 모름지기 句法과 字法을 세탁하고 鑄造한 곳을 보아야 할 것이다.
房公은 諱가 啓이고 字가 아무개인데, 河南 사람이다. 그 曾祖父는 房融이고 祖父는 房琯이니, 연이어 父子가 재상을 지냈다.
房融은 則天武后 때에 재상을 지냈으니, 시대가 이미 오래되어 事蹟이 크게 전해지지 않는다. 房琯은 玄宗과 肅宗 때에 재상이 되어, 어려운 가운데 있으면서도 出仕와 隱退를 道에 맞게 하였고,
薨逝하자 太尉에 추증되어, 명성이 오늘까지 전해진다. 父親 房乘은 벼슬이 祕書少監에 이르렀고, 太子詹事에 추증되었다.
房公은 祖先의 공덕으로 〈가문이 영예로울 때에〉 胚胎되었고, 출생해 자랄 적에 먹고 호흡하는 사이에도 典訓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아 눈에 익고 귀에 젖어서 배우지 않고도 능하였다.
처음 鳳翔府參軍이 되었을 때에 아직 나이가 적었으되 영접하는 官吏들이 바라보고는 모두 “참으로 房太尉家의 子孫이로다.” 하고서 감히 公事로써 公을 속이지 못하였다.
同州 澄城縣丞으로 榮轉해서는 몸가짐을 더욱 삼가고 다스리니, 동료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衛晏이 嶺南黜陟使가 되었을 때에 輔佐할 사람을 구하여 房公을 보좌로 삼고, 良吏를 발탁하고 姦吏를 제거하니 남방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돌아온 뒤에 昭應主簿로 승진하였다. 裴冑가 湖南觀察使가 되었을 때에 조정에 表奏하여 房公을 輔佐로 삼고, 監察御史에 임명하니 소관부서에서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裴冑가 江西觀察使가 되고, 또 江陵尹 荊南節度使가 되었을 때에도 房公은 한결같이 移動하는 裴冑를 따라가 보좌하니, 功이 쌓여 승진해 刑部員外郞에 이르러 5品服을 하사받고 裴冑의 節度使의 일을 補助[副]하는 上介가 되었다.
皇上께서 房公의 이름을 들으시고 그를 불러들여 虞部員外에 제수하셨다. 尙書省에서 명성이 자자하더니 萬年縣令으로 승진해서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 과감히 결단하고 밝게 분변하고 급속히 처리하였다.
貞元 말엽 王叔文이 執政[用事]하였을 때에 房公을 人材로 여겨 房公을 천거해 容州經略使로 삼고 御史中丞에 제수하고서 3品에 준하는 官服과 佩帶를 내리고 嶺外(嶺南) 13개 州의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숲속과 굴속에 거주하는 蠻夷가 〈房公의 善政에 감화하여〉 조약을 사수하여 서로 약탈하지도 겁박하지도 않자, 〈방공은〉 賦稅를 줄여주고 제때에 징수하니 公家나 私家에 모두 여유가 있었다.
房公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줄이고 재물을 물려줄 계책을 세우지 않고서 친척과 벗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義理로 여겼다. 容州에 9년 동안 있다가 승진하여 桂管觀察使가 되고 淸河郡公에 봉해지니 食邑이 3천 戶였다.
中人(宦官)이 使者로 와서 房公에게 詔書를 전하였는데, 房公이 그를 禮에 맞게 접대하지 않아, 主客 사이에 언어로 인한 不和가 생기니 이에 〈황제는〉 房公을 徵召하여 太僕少卿으로 삼았다. 이에 京師에 당도하기 전에 虔州長史로 貶斥하고, 使者를 死刑에 처하였다.
질병으로 官에서 卒하니 향년이 59세였다. 그 아들 房越은 부친의 事跡을 빠짐없이 수집하여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효도를 다하였다. 장사를 지낸 뒤에 墓碣을 세우고자 나에게 銘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銘을 짓는다.
房氏 가문에 두 재상 나오시어
그 가문의 명성 드러내셨네
支孫들도 은택 입었는데
손자인 공이야 말해 뭣하랴
공이 처음 관리 되신 것도
조상의 공덕 힘입어서이지
남방에서 黜陟使 보좌할 때에
처음임에도 치적을 이루셨네
萬年縣에서 현령의 직무 마친 뒤에
명을 받고 멀리 容州에서 복무했네
공적이 탁월하니
蠻夷들도 도리를 따르고 생업을 즐겼네
使者를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가
관직도 잃고 재물도 잃으셨네
房公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명을 지어 그 평생을 드러내기 위함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