堯不得以與
하고 舜不得以與
하며 而
不得奪諸舜
하니 發於其心
하고 出於其言
하며 見於其事
하여 確乎其不可易也
니라
聖人不得以與人하고 父不得奪諸其子하니 於此見天之所以與我者는 不偶然也라
夫其所以與我者
는 必有以用我也
니 我知之
로되 不得行之
하고 이면 天固用之
어늘 我實置之
라
自卑以求幸其言하며 自小以求用其道면 天之所以與我者何如인대 而我如此也오
棄天은 我之罪也요 褻天도 亦我之罪也나 不棄不褻而人不我用이면 不我用之罪也니 其名曰逆天이라
然則棄天褻天者는 其責在我나 逆天者는 其責在人이니 在我者는 吾將盡吾力之所能爲者하야 以塞夫天之所以與我之意하고 而求免夫天下後世之譏나 在人者는 吾何知焉이리오
之徒
가 不足相與以有爲也
를 我亦知之矣
나 抑將盡吾心焉耳
라
吾心之不盡이면 吾恐天下後世無以責夫衛靈魯哀齊宣梁惠之徒요 而彼亦將有以辭其責也라
夫聖人賢人之用心也는 固如此하니 如此而生하고 如此而死하고 如此而貧賤하고 如此而富貴하며 升而爲天하고 沈而爲淵하고 流而爲川하고 止而爲山은 彼不預吾事니 吾事畢矣라
切(竊)怪夫後之賢者가 不能自處其身也하여 饑寒困窮之不勝而號于人이라
嗚呼
라 使吾誠死於饑寒困窮耶
면 則天下後世之責
이 將
리니 其身之責
을 不自任以爲憂
하고 而吾取而加之吾身
이면 不亦過乎
아
何則고 天下之學者가 孰不欲一蹴而造聖人之域이리오
然이나 及其不成也하여는 求一言之幾乎道나 而不可得也라
千金之子는 可以貧人하고 可以富人이나 非天之所與면 雖以貧人富人之權이라도 求一言之幾乎道나 不可得也니이다
天子之宰相은 可以生人하고 可以殺人이나 非天之所與면 雖以生人殺人之權이라도 求一言之幾乎道나 不可得也니이다
其言語其文章을 雖不識其果可以有用于今而傳於後與否라
獨怪夫得之之不勞
요 方其致思于心也
에 若或啓之
하고 得之心而書之紙也
에 하니
千金之子와 天子之宰相이 求而不得者가 一旦在己라
饑寒困窮이 亂其心하고 而聲律記問이 又從而破壞其體하니 不足觀也已라
數年來에 退居山野하여 自分永棄하고 與世俗日疏闊이라
得以大肆其力于文章
하니 와 之淸深
과 之溫醇
과 之雄剛
과 之簡切
에 投之所向
이면 無不如意
라
嘗試以爲
은 得聖人之經
이나 其失也流而爲迂
요 는 聖人之權
이나 其失也流而爲詐
라
洵有山田一
하니 非凶歲
면 可以無饑
요 力耕而節用
이면 亦足以自老
라
不肖之身은 不足惜이나 而天之所與者를 不忍棄하고 且不敢褻也라
執事之名은 滿天下하니 天下之士를 用與不用이 在執事라
平生之文
은 遠不可多致
나 有
은 近以獻內翰歐陽公
하니 度執事與之朝夕相從
하야 議天下之事
하니 則斯文也其亦庶乎
矣
니이다
若夫言之可用과 與其夫身之可貴與否者는 執事事也요 執事責也니 於洵何有哉오
注
荊川曰 此書는 本欲求知나 却說士當自重이면 便不放倒架子라
注
이 글의 골자는 원래 한유韓愈가 쓴 〈여우양양서與于襄陽書(우양양于襄陽에게 준 편지)〉에서 유래되었으나 기세가 특히 우뚝하다.
하늘이 나에게 자질資質을 부여해준 까닭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요堯임금도 자질을 단주丹朱에게 부여할 수가 없었고, 순舜임금도 자질을 상균商均에게 부여할 수가 없었으며, 고수瞽瞍는 또한 그것을 순舜으로부터 뺏을 수가 없었으니, 그것은 그의 마음을 통하여 발휘되고 그의 말을 통하여 표현되고 그의 일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어서, 확고하여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인聖人도 남에게 물려줄 수가 없고, 아버지도 그의 아들로부터 빼앗을 수가 없는 것이니, 여기에서 하늘이 나에게 자질을 부여해준 까닭은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자질을 나에게 부여해준 까닭은 반드시 나를 쓸 곳이 있기 때문이니, 내가 그것을 알고서도 그것을 행하지 못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일러주지 못한다면, 하늘은 진실로 쓰려 하는데도 내가 실은 그것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늘을 버리는 것[기천棄天]’이라 부릅니다.
스스로 비하卑下하면서 그의 말이 사랑받기를 바라며, 스스로 작게 여기면서 그의 도道가 쓰이기를 바라면, 하늘이 나에게 자질을 부여해준 까닭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그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을 ‘하늘을 모독冒瀆하는 것[설천褻天]’이라 부릅니다.
‘하늘을 버리는 것’도 나의 죄이고, ‘하늘을 모독하는 것’도 나의 죄이나, 버리지도 않고 모독하지도 않는데 사람들이 나를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를 쓰지 않는 사람들의 죄이니, 이것을 ‘하늘을 거역拒逆하는 것[역천逆天]’이라 부릅니다.
그러니 ‘하늘을 버리는 것’과 ‘하늘을 모독하는 것’은 그 책임이 나에게 있고, ‘하늘을 거역하는 것’은 그 책임이 남에게 있는 것이니,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은 내가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바를 다함으로써 하늘이 나에게 자질을 부여해준 뜻에 보답하고, 온 천하와 후세 사람들의 비난을 면하려 하면 되나, 남에게 있는 일은 내가 어찌 알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일신一身의 책임을 면하려 하는 데에도 겨를이 없거늘 어느 겨를에 남을 위하여 걱정하겠습니까?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께서 불우하실 때에는 길에서 늙어가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게을리 하거나 성내거나 부끄러워하거나 기운을 잃지 않으셨던 것은 진실로 그 책임이 있는 곳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위 영공衛 靈公‧노 애공魯 哀公‧제 선왕齊 宣王‧양 혜왕梁 惠王의 무리들은 서로 함께 큰 일을 하기에는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공자孔子와 맹자孟子) 또한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나의 마음을 다할 따름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나는 천하와 후세 사람들이 위 영공, 노 애공, 제 선왕, 양 혜왕 등을 책망하지 못할까 두렵고, 그들도 그 책임을 변명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공자와 맹자께서는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의 마음 씀은 진실로 이와 같으니, 이와 같이 하면서 살아가고, 이와 같이 하면서 죽어가고, 이와 같이 하면서 빈천貧賤하게 지내기도 하고, 이와 같이 하면서 부귀富貴를 누리기도 하며, 올라가서는 하늘처럼 되고, 가라앉으면 연못처럼 되고, 흐르면 냇물처럼 되고, 멈추면 산처럼 되나, 그들이 나의 일을 간섭하지 않으면, 나의 일은 그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제가 괴이하게 여기는 것은 후세의 현명賢明한 사람들이 그 스스로 처신處身하지 못하여 굶주림과 추위와 곤궁함을 이겨내지 못해 남에게 소리쳐서 〈구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아아! 내가 진실로 굶주림과 추위와 곤궁으로 죽게 된다면 천하와 후세 사람들이 책임을 추궁할 대상이 반드시 있게 될 것이니, 저편에서 그들 자신들의 책임을 스스로 책임질 걱정을 하도록 하지 아니하고, 내가 그 책임을 취하여 내 자신에게 가한다면 또한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저와 같은 못난 사람이 어찌 감히 또한 멋대로 성현聖賢의 대열에 들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마음에는 매우 스스로를 가벼이 하지 않는 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천하의 학자學者들이 어느 누군들 한꺼번에 성인聖人의 경지境地에 이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성공하지 못했을 때에는 도道에 가까운 한마디 말을 구해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천금千金의 부잣집 아들은 남을 가난하게 할 수도 있고 남을 부유하게 할 수도 있지만, 하늘이 부여하지 않는다면 비록 남을 가난하게 하거나 부유하게 하는 권세權勢를 가졌다 할지라도, 도道에 가까운 한마디 말은 구해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천자天子의 재상宰相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하늘이 부여하지 않는다면 비록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 할지라도, 도道에 가까운 한마디 말은 구해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저는 성인과 현인의 술법術法에 힘을 써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저의 말과 저의 문장文章을 비록 지금 세상에 유용할 수 있을는지, 그리고 후세에 전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홀로 괴이하게 여기는 것은, 그것들을 터득하는 데에 수고를 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사색思索을 하면 마치 누가 계도啓導해주는 듯하며, 마음속에 그것을 터득하여 그것을 종이에 쓰면 마치 누가 도와주는 듯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도道에 가까운 것이 한마디도 없겠습니까?
천금의 부잣집 아들과 천자의 재상이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제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마음에 그것을 지녔음을 자부하며, 하늘이 그것을 저에게 부여해준 까닭이 또한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집사執事를 익주益州에서 뵈었으나, 그때의 글은 얕고 좁아서 가소로웠습니다.
굶주림과 추위와 곤궁이 그 마음을 어지럽히고, 글의 성률聲律과 잡된 지식智識이 또한 뒤따라 그 몸을 파괴하고 있어서 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몇 년 이래로 산야山野에 물러나 살면서 영영 버려짐을 자신의 분수로 여기며 세속世俗과 날로 멀리 떨어져갔습니다.
그래서 온 정력精力을 문장文章에 크게 발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시경詩經》 작자들의 여유와 자유스러움, 《초사楚辭》 작자들의 맑음과 깊음, 맹자孟子‧한유韓愈의 온화함과 진실함, 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의 빼어남과 강함, 손자孫子‧오자吳子의 간결함과 절실함에 향하려 하기만 하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게 없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생각하기에 한漢나라 동중서董仲舒는 성인聖人의 경전經典을 터득했었지만 그의 잘못은 사실과 멀게 흘러간 것이요, 조조晁錯는 성인聖人의 임기응변臨機應變을 터득하였지만 그의 잘못은 삐뚤어진 길로 흘러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재능을 가지고 잘못된 길로 흐르지 않은 이는 가의賈誼라 할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지금 세상에서 저는 그러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두 편의 책론策論을 지어 〈심세審勢〉‧〈심적審敵〉이라 제목을 붙였고, 글 열 편을 지어 〈권서權書〉라 하였습니다.
제게는 산속의 밭 1경頃이 있으니, 흉년凶年만 아니라면 굶주리지 않을 수 있고, 힘써 농사지으며 쓰는 것을 절약節約하면 스스로 늙기까지 살기에도 족할 것입니다.
이 못난 자신은 아까울 게 없으나, 하늘이 부여해준 것을 차마 버릴 수도 없고 또한 감히 더럽힐 수도 없습니다.
집사執事의 명성名聲은 천하에 가득 찼으니, 천하 선비들을 쓰거나 쓰지 않는 것은 집사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이른바 책론策論 2편과 〈권서權書〉 10편을 바치는 바입니다.
평소에 지은 글은 멀어서 많이 보내드릴 수가 없으나, 〈홍범론洪範論〉과 〈사론史論〉 10편은 근래 내한內翰 구양수歐陽脩 공에게 바쳤으니, 생각건대 집사께서는 그분과 함께 조석朝夕으로 어울리시어 천하의 일을 의논하고 계실 것이니, 그 글들도 집사 앞에 펴지게 될 것입니다.
그 말들이 쓸 만한 것인지, 또 그 몸을 귀하게 해줄 만한지 아닌지는 집사께서 결정하실 일이며 집사의 책임이기도 하니, 제가 어찌 관여할 일이겠습니까?
注
형천荊川(당순지唐順之)은 “이 글은 본래 알아주기를 구하고자 하면서도 오히려 선비가 자중自重하면 결구結構가 무너지지 않음을 말하였다.
문자文字가 준절峻絶하고 호방豪放하여 얽매이지 않았다.”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