愚瞽頓仆
하야 不復自比於朋友
러니 不謂故人
이 尙爾記錄
하고 遠枉手敎
하야 甚厚
하고 且審比來起居佳勝
하오니 感慰不可言
이니이다
旣無所失亡
하고 而有得於齊寵辱, 忘得喪者
하니 是
니이다
僕은 旣以任意直前하야 不用長者所敎하야 以觸罪罟니이다
黃州는 濱江帶山하야 旣適耳目之好하고 而生事百需가 亦不難致라
偶讀戰國策
이라가 見
하고 欣然而笑
하니 若蠋者
는 可謂巧於居貧者也
라
菜羹菽黍
도 差饑而食
하면 其味與
等
이요 而旣飽之餘
엔 芻豢滿前
이라도 惟恐其不持去也
라
所云讀佛書及合藥救人二事는 以爲閑居之賜甚厚니이다
佛書는 舊亦嘗看이나 但闇塞하야 不能通其妙하고 獨時取其麤淺假說하야 以自洗濯하니 若農夫之去草에 旋去旋生하야 雖若無益이나 然終愈於不去也라
往時에 陳述古好論禪하야 自以爲至矣라하고 而鄙僕所言을 爲淺陋라하니
僕嘗語述古호되 公之所談은 譬之飮食하면 龍肉也요 而僕之所學은 猪肉也라 猪之與龍則有間矣나
然公終日說龍肉이 不如僕之食猪肉이 實美而眞飽也라하니이다
學佛老者는 本期於靜而達하나니 靜似懶하고 達似放이라
學者或未至其所期하고 而先得其所似하면 不爲無害라
來書云 處世得安穩無病
하고 麤衣飽飯
하야 不造
이면 乃爲至足
이라하니 三復斯言
에 感歎無窮
이라
世人所作은 擧足動念이 無非是業이니 不必刑殺無罪하고 取非其有然後에 爲寃業也니이다
삼가 작별한 지 어느덧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저는 사리에 어두워 쓰러지고 나서는 다시는 스스로 붕우들에게 견주지 못하였는데, 뜻밖에 친구가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멀리서 손수 편지를 보내서 매우 후하게 존문存問하시고 또 근래 기거起居(동정動靜)가 매우 편안함을 살폈으니, 감사하고 위로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나산羅山은 평소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으니 응당 장려瘴癘(습해서 생기는 병)가 있을 수가 없을 것인데, 어찌 세시歲時가 마침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잃은 바가 없고, 은총과 치욕을 똑같이 여기고 얻고 잃는 것을 잊음에 깨달음이 있었으니, 이는 하늘이 그대를 도운 것입니다.
저는 제 생각대로 곧장 앞으로 나아가서 장자長者들이 가르친 바를 따르지 아니하여 이미 죄망罪網에 저촉되었습니다.
그러나 화와 복은 요컨대 밀쳐내고 피할 수 없는 것이니, 애당초 공교롭게 대처하고 졸렬하게 대처하는 것을 논할 것이 없습니다.
이곳 황주黃州는 강가에 있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귀와 눈을 즐겁게 하기에 적합하고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온갖 물건을 장만하기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저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서 또 이른바 화복이란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모릅니다.
우연히 《전국책戰國策》을 읽다가 처사 안촉顔蠋의 “늦게 먹음으로써 고기를 당해낸다.”는 말을 보고 흔연히 웃었으니, 안촉顔蠋과 같은 자는 가난에 잘 대처한 자라고 이를 만합니다.
나물국과 콩과 기장밥도 약간 굶주릴 때에 먹으면 그 맛이 팔진미八珍味와 똑같고, 이미 배부른 뒤에는 고기가 밥상 앞에 가득하더라도 다만 치우지 않는 것을 근심합니다.
음식의 맛이 좋고 나쁜 것은 나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물건과 상관이 있겠습니까?
말씀하신 불경佛經을 읽는 일과 약을 조제하여 사람을 구제하는 두 가지 일은 제가 한가히 거처할 때에 좋은 가르침이 되어 은혜됨이 매우 두텁습니다.
불경은 예전에도 본 적이 있으나 제가 어둡고 막혀서 그 묘리妙理를 통하지 못하고, 다만 때로 거칠고 얕은 가설假說을 취하여 스스로 마음을 세탁하였으니, 이는 농부가 풀을 제거할 적에 제거하자마자 곧바로 다시 생겨나서 비록 무익한 것 같으나, 끝내 제거하지 않은 것보다는 나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군자들이 이른바 “초연히 크게 깨달았다.”는 것으로 말하면 저는 알지 못합니다.
지난번 진술고陳述古가 선학禪學을 논하기 좋아하여 스스로 자신은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고, 제가 말하는 것은 천루淺陋하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일찍이 진술고陳述古에게 말하기를 “공公이 말하는 것은 음식에 비유하면 용龍고기이고 제가 배운 것은 돼지고기이니, 돼지고기와 용龍고기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이 종일토록 입으로 용龍고기를 말하는 것이 제가 돼지고기를 실로 맛있고 참으로 배부르게 먹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대가 불경에서 얻은 것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생生과 사死를 벗어나고 삼승三乘을 초월하여 마침내 부처가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우리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입니까?
불교佛敎와 노장老莊을 배우는 자들은 본래 고요하고 통달하기를 기약하는데, 고요함은 게으름과 유사하고 통달함은 방종함과 유사합니다.
배우는 자가 혹 기약한 바에 이르기 전에 먼저 그 유사한 바를 얻으면 폐해가 없지 못합니다.
저는 항상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의심하였기 때문에 또한 그대에게 이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보내주신 편지에 이르기를 “세상을 살아감에 편안하여 병이 없고, 거친 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면서 원업寃業을 짓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지극한 만족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씀을 세 번 반복하면서 감탄하여 마지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은, 발을 들 때나 생각을 할 때마다 이 원업寃業 아닌 것이 없으니, 굳이 죄 없는 사람을 형벌하여 죽이고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한 뒤에야 원업寃業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굴을 마주하여 의논할 길이 없으니, 이로써 한번 웃고 말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