予與荊川으로 嘗力稱子由之文이 自不易得이러니 而子瞻亦云如此라
之文
이 實勝僕
이어늘 而世俗不知
하고 乃以爲不如
라
其爲人
이 深不願人知之
하니 其文
이 如其爲人
이라 故
로 汪洋澹泊
하야 有
之聲
하니
而其秀傑之氣
를 終不可沒
일새 作
하야 乃稍自振厲
하야 若欲以警發憒憒者
어늘 而或者便謂僕代作
이라하니 此尤可笑
라
其源이 實出於王氏하니 王氏之文이 未必不善也로되 而患在於好使人同己라
自孔子로 不能使人同하야 顔淵之仁과 子路之勇을 不能以相移어늘 而王氏欲以其學同天下라
地之美者는 同於生物이나 不同於所生이요 惟荒瘠斥鹵之地는 彌望에 皆黃茅白葦하니 此則王氏之同也라
近見
호니 言先帝晩年
에 甚患文字之陋
하사 欲稍變取士法
이나 特未暇耳
라하니라
使後生
으로 猶得見古人之大全者
는 正賴
與君等數人耳
라
나는 일찍이 당형천唐荊川(당순지唐順之)과 함께 자유子由(소철蘇轍)의 글이 본래 얻기 쉽지 않은 문장이라고 강력하게 칭찬하였는데, 자첨子瞻도 또한 이와 같이 말하였다.
문잠 현승장군文潛 縣丞張君 족하足下께 머리 조아립니다.
작별한 지 오래되어 그리운 마음 간절하였으나 도성에 이르러는 공사公私간에 분분하여 편지를 받들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손수 쓴 편지를 받아서 우선 기거起居가 건승함을 살피니, 지극히 위로되고 지극히 위로됩니다.
보내주신 문편文編을 세 번 반복하여 읽고 감탄하였으니, 그대의 문장이 자유子由와 참으로 유사합니다.
자유子由의 문장이 실로 나보다 나은데, 세속에서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나보다 못하다고 여깁니다.
자유子由의 사람됨은 남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깊이 원하지 않으니, 글도 인품과 똑같아서 끝없이 넓고 담박하여 한 사람이 창唱하면 세 사람이 감탄하는 순후한 소리가 있습니다.
그 빼어나고 걸출한 기운을 끝내 없앨 수가 없으므로 〈황루부黃樓賦〉를 지어 비로소 약간 스스로 진작하고 떨쳐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일깨우고자 하였는데, 혹자는 이를 내가 대신 지었다고 말하니, 이는 더욱 가소로운 일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나의 선기善機를 본 때문일 것입니다.
문장의 쇠퇴함이 요즘과 같은 적은 있지 않았습니다.
그 근원은 실로 왕안석王安石에게서 나왔으니, 왕안석王安石의 글이 반드시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병통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자기와 같아지기를 좋아하는 데에 있습니다.
공자孔子께서도 제자들을 똑같게 하지 못해서 안연顔淵의 어짊과 자로子路의 용맹을 서로 바꾸지 못하셨는데, 왕안석王安石은 자기의 학문을 가지고 천하 사람을 똑같이 하고자 합니다.
비옥한 땅이 물건을 내는 것은 똑같으나 내는 물건은 똑같지 않으며, 오직 거칠고 척박하고 또 소금기 있는 바닷가의 땅은 멀리서 바라봄에 모두 누런 억새와 흰 갈대뿐이니, 이것이 바로 왕안석王安石이 원하는 똑같음입니다.
근래에 장자후章子厚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선제先帝께서도 말년에 문자의 누추함을 매우 염려하셔서 선비를 선발하는 방법을 약간 바꾸고자 하셨으나 다만 겨를이 없으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차츰 시부詩賦를 복구하고 《춘추春秋》의 학관學官을 세우고자 하니,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후생들로 하여금 그래도 고인의 크게 완전한 것을 볼 수 있게 하려면 바로 황로직黃魯直, 진소유秦少游, 조무구晁無咎, 진리상陳履常과 그대와 같은 몇 사람들을 의뢰할 뿐입니다.
듣건대 군君이 태학의 박사가 되었다 하니, 더욱 힘쓰기 바랍니다.
덕德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으나 이것을 능히 거행하는 이가 드뭅니다.
내 도와주려고 도모해보나 사랑하여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우연히 아침술을 마셔서 취하였고, 온 사람이 편지를 요구하여 자세히 쓰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