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始皇帝十八年에 取韓하고 二十二年에 取魏하고 二十五年에 取趙, 取楚하고 二十六年에 取燕, 取齊하야 初幷天下하니라
然이나 吾以爲巧於取齊而拙於取楚하니 其不敗於楚者는 幸也라하노라
하니 秦知創智伯
이어늘 而諸侯終不知師魏韓
하니 秦幷天下 不亦宜乎
아
法章死하고 王建立六年에 而秦攻趙하니 齊楚救之러니
秦遂圍邯鄲하야 幾亡趙하니 趙雖未亡이나 而齊之亡形이 成矣라
夫以法章之才로 而秦伐之어늘 建之不才로 而秦不伐은 何也오
吾故曰 巧於取齊者는 所以大慰齊人之心而解三晉之交也니라
秦未嘗須臾忘齊也어늘 而四十餘年을 不加兵者는 豈其情乎아
齊人不悟하고 而與秦合이라 故로 秦得以其間으로 取三晉하니 三晉亡이면 齊蓋岌岌矣라
方是時하야 猶有楚與燕也하니 三國合이면 猶足以拒秦이어늘
故
로 二國亡
에 而齊亦虜不閱歲
하야 如
하니 可不謂巧乎
아
二國旣滅에 齊乃發兵守西界하야 不通秦使하니 嗚呼라
使齊有
하야 知亡之無日
하야 而掃境以伐秦
이런들 以久安之齊
로 而入厭兵空虛之秦
이면 覆秦如反掌也
라
曰 古之取國者는 必有數하니 如取齠齒也에 必以漸이라 故로 齒脫而兒不知하나니라
今秦易楚하야 以爲是齠齒也可拔이라하야 遂抉其口하야 一拔而取之하니 兒必傷이요 吾指必齧이라
吳爲三軍하야 迭出以肄楚하야 三年而入郢하니 晉之平吳와 隋之平陳이 皆以是物也라
使堅知出此
하야 以百倍之衆
으로 爲迭出之計
런들 雖
이라도 不能支
어든 而況謝玄, 牢之之流乎
아
진시황제秦始皇帝 즉위 18년(B.C. 229)에 한韓나라를 점령하였고, 22년에 위魏나라를 점령하였고, 25년에 조趙나라와 초楚나라를 점령하였고, 26년에 연燕나라와 제齊나라를 점령하여 처음으로 천하를 겸병하였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겸병한 것은 도道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공교로웠을 뿐이요, 그렇다고 요행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하건대 제齊나라를 점령하는 데는 공교로웠으나 초楚나라를 점령하는 데는 졸렬하였으니, 초楚나라에게 패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라고 여겨진다.
진秦나라의 공교로움은 지백智伯을 징계한 것일 뿐이다.
위魏나라와 한韓나라가 팔뚝과 발처럼 붙어 연합해서 지백智伯이 죽었는데, 진秦나라는 지백智伯을 징계할 줄 알았으나 제후들은 끝내 위魏․한韓을 본받을 줄 몰랐으니, 진秦나라가 천하를 겸병함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제齊나라 민왕湣王이 죽고 법장法章이 즉위하자 군왕후君王后가 그를 보좌하였으나, 진秦나라는 그대로 제齊나라를 정벌하였다.
그러다가 법장法章이 죽고 제왕 건齊王 建이 즉위한 지 6년에 진秦나라가 조趙나라를 공격하니, 제齊나라와 초楚나라가 구원하였다.
조趙나라가 양식이 떨어지자 제齊나라에 양식을 보내줄 것을 청했으나 제齊나라는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秦나라가 마침내 조趙나라의 도성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여 조趙나라가 거의 망하게 되었으니, 이때 조趙나라가 비록 망하지는 않았으나 제齊나라가 망할 형세가 이루어진 것이다.
진秦나라는 이것을 알았으므로 제齊나라에게 무력을 가하지 않은 것이 40여 년이었다.
법장法章과 같이 훌륭한 재주로도 진秦나라가 정벌하였는데 제왕 건齊王 建처럼 재주 없는 사람을 진秦나라가 정벌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태사공太史公(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군왕후君王后가 진秦나라를 지성으로 섬겼기 때문에 병란(공격)을 입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겸병하고자 하였으니, 어찌 지성으로 섬긴다 하여 제齊나라를 내버려두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제齊나라를 취하는 데 공교로웠다고 말한 것은 진秦나라가 제齊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위로해주어 삼진三晉과의 연합을 와해시켰기 때문이었다.
진秦나라가 잠시도 제齊나라를 잊지 않았는데, 40여 년 동안 무력을 가하지 않은 것이 어찌 그 실정實情이었겠는가?
제齊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진秦나라와 연합하였으므로 진秦나라는 그 틈을 이용하여 삼진三晉을 점령하였으니, 삼진三晉이 망하면 제齊나라가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 아직도 초楚나라와 연燕나라가 남아 있었으니, 초楚․연燕․제齊 3국이 연합했다면 아직도 충분히 진秦나라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진秦나라가 군사를 크게 출동하여 초楚나라를 정벌하고 연燕나라를 정벌하였으나, 제齊나라는 이들을 구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초楚․연燕 두 나라가 멸망하였고, 제齊나라 또한 1년이 넘지 않아 제왕齊王이 포로가 되어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진晉나라가 우虞나라와 괵虢나라를 점령한 것처럼 하였으니, 공교로웠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초楚․연燕 두 나라가 멸망하자 제齊나라는 그제야 비로소 군대를 내어 서쪽 경계를 지키고 진秦나라와 사신을 왕래하지 못하게 했으니, 아!
진秦나라가 처음 이신李信을 보내어 20만 군대로 초楚나라를 공격하게 했다가 이기지 못하자 이에 왕전王翦으로 하여금 60만 대군으로 초楚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니, 이는 나라를 텅 비워두고 싸운 것이다.
만일 제齊나라에 중간 정도의 군주와 보통의 신하가 있어서 제齊나라가 언제 망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온 경내를 다 동원하여 진秦나라를 공격했더라면, 오랫동안 편안한 제齊나라 군대로 병란에 시달린 채 텅 비어 있는 진秦나라로 쳐들어간 것이 되니, 그렇다면 진秦나라를 전복시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초楚나라를 점령하는 데는 졸렬했다고 하는 것이다.
옛날에 남의 나라를 점령하는 자들은 반드시 술수가 있었으니, 마치 어린아이의 삭은니(젖니)를 뽑을 적에 반드시 점진적으로 하기 때문에 이가 빠져도 아이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런데 지금 진秦나라는 초楚나라를 깔보고 이것을 삭은니를 뽑듯이 단번에 뽑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서 마침내 어린아이의 입을 벌리고 일거에 뽑아 취하려 하였으니, 아이는 반드시 입 안이 상할 것이고 내 손가락을 반드시 깨물 것이다.
그러므로 진秦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요 술수가 아닌 것이다.
오吳나라가 3군軍을 만들어 번갈아 출동시켜 초楚나라를 피곤하게 해서 3년 만에 초楚나라 수도인 영읍郢邑으로 쳐들어갔으니, 진晉나라가 오吳나라를 평정한 것과 수隋나라가 진陳나라를 평정할 적에도 모두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만일 부견苻堅이 이 방법을 사용할 줄 알아서 백 배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 번갈아 출동하는 계책을 썼더라면, 비록 한신韓信과 백기白起와 같은 명장이라도 버틸 수 없었을 터인데 하물며 사현謝玄과 유뇌지劉牢之와 같은 무리에 있어서랴!
나는 이 때문에 두 진秦나라가 똑같은 방법을 썼음을 알 수 있으니, 다만 시황始皇은 요행이고 부견苻堅은 불행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