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子翬請殺桓公하야 以求太宰한대 隱公曰 爲其少故也니 吾將授之矣라
使營菟裘하니 吾將老焉호리라한대 翬懼하야 反譖公於桓公而弑之하니라
塗之人이 與盜非仇也로되 以爲不擊이면 則盜且幷殺己也일새라
隱公은 惠公의 繼室之子也니 其爲非嫡이 與桓均爾요 而長於桓이어늘 隱公이 追先君之志하야 而授國焉하니 可不謂仁乎아
하고 하니 此二人之智 若出一人
이요 而其受禍 亦不少異
하야
里克은 不免於惠公之誅하고 李斯는 不免於二世之虐하니 皆無足哀者로되 吾獨表而出之하야 以爲世戒하노라
然이나 君子之所爲는 義利常兼이요 而小人은 反是라
故로 勉而聽高하니 使斯聞高之言하고 卽召百官, 陳六師하야 而斬之면 其德於扶蘇 豈有旣乎아 何蒙氏之足憂리오
如厠이라가 還하야 問小同호되 見吾疏乎아 曰 不見이로라
師曰 寧我負卿이언정 無卿負我라하고 遂酖之하니라
允之已醒하야 悉聞其言하고 慮敦疑己하야 遂大吐하야 衣面皆汙라
吾讀史라가 得魯隱公, 晉里克, 秦李斯, 鄭小同, 王允之五人하고 感其所遇禍福如此라
공자 휘公子 翬가 환공桓公을 죽일 것을 청하며 태재太宰 자리를 요구하였으나, 은공隱公은 말하기를 “그가 어리기 때문에 내가 임금이 된 것이니, 나는 장차 임금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겠다.
내가 사람을 시켜 토구菟裘를 경영하게 하였으니, 내 장차 그곳에서 노년을 보내겠다.”라고 하자, 공자 휘公子 翬는 두려워하여 도리어 은공隱公을 환공桓公에게 참소해서 시해하였다.
강도强盜가 무기를 들고 남을 겨누면 사람들이 반드시 그 강도强盜를 죽이려 할 것이니, 어찌 다만 강도가 무기로 겨눈 자뿐만이겠는가?
길을 가는 사람도 모두 강도强盜를 공격하여 잡으려 할 것이다.
길을 가는 사람이 강도强盜와 원수진 것이 아닌데도 강도를 공격하는 것은 ‘공격하지 않으면 강도가 장차 자신까지도 죽일 것이다.’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은공隱公의 지혜는 일찍이 길 가는 사람의 지혜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가련하다.
은공隱公은 혜공惠公의 계실繼室의 자식이니 환공桓公과 똑같이 적자嫡子가 아니었고 나이가 환공桓公보다 많았는데, 선왕先王의 뜻을 추념하어 환공桓公에게 나라를 물려주려고 했으니, 인仁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은공隱公이 공자 휘公子 翬를 죽이고 나라를 환공桓公에게 양보했더라면, 비록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여희驪姬가 신생申生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이극里克을 어렵게 여겼는데 시우施優가 이극里克을 끌어들였고, 진秦나라 이세황제二世皇帝가 자기 형 부소扶蘇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이사李斯를 어려워하였는데 조고趙高가 이사李斯를 끌어들였으니, 이 두 사람의 지혜가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처럼 똑같고 그 화를 받은 것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극里克은 혜공惠公의 주벌을 면치 못하였고 이사李斯는 이세황제二世皇帝의 사나움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극里克과 이사李斯 두 사람은 모두 불쌍하게 여길 만한 것이 없으나, 나는 오직 이 사실을 표출해서 세상의 경계로 삼는 바이다.
군자君子는 인의仁義를 행할 적에 이해利害를 계산하지 않는다.
그러나 군자가 하는 바는 의義와 이利를 항상 겸하여 갖추고, 소인小人은 이와 반대이다.
이사李斯가 조고趙高의 계책을 따른 것은 본심이 아니고, 다만 몽씨蒙氏가 자신의 지위를 빼앗을까 두려워해서였다.
그러므로 억지로 조고趙高의 말을 따른 것이니, 만일 이사李斯가 조고趙高의 말을 듣고는 즉시 백관百官을 불러 모으고 육군六軍을 진열하여 조고趙高의 목을 베었다면, 부소扶蘇에게 은덕이 되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었겠으며, 어찌 몽씨蒙氏를 근심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사李斯는 이것을 버린 채 하지 않고 결국은 오형五刑을 갖추어 시장에서 죽임을 당했으니, 이사李斯는 하우下愚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독사가 독을 남긴 풀과 나무도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데, 하물며 그 독사가 직접 문 경우에 있어서랴?
정소동鄭小同이 고귀향공高貴鄕公의 시중侍中이 되어 일찍이 사마사司馬師를 찾아갔는데, 사마사司馬師에게 밀소密疏가 있었으나 미처 이것을 치우지 못하였다.
사마사司馬師가 측간에 갔다가 돌아와 자신의 소疏를 보았는지를 묻자, 정소동鄭小同은 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사마사司馬師는 말하기를 “차라리 내가 그대를 저버릴지언정, 그대가 나를 저버리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독약을 먹여 죽였다.
왕윤지王允之가 왕돈王敦을 따라 밤에 술을 마시다가 취하자 자리를 사양하고 먼저 잠자리에 들었는데, 왕돈王敦이 전봉錢鳳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였다.
이때 왕윤지王允之가 술이 깨어 그들의 말을 모두 듣고는 왕돈王敦이 자기를 의심할까 우려하고 마구 토하여 옷과 얼굴이 모두 더럽혀졌다.
과연 왕돈王敦이 불을 비추어 왕윤지王允之가 토한 채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크게 취하여 자기들의 계획을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여겨〉 죽이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라고 하셨으니, 이 때문인 것이다.
나는 역사책을 읽다가 노魯나라의 은공隱公과 진晉나라의 이극里克과 진秦나라의 이사李斯와 정소동鄭小同과 왕윤지王允之 등 다섯 사람을 얻고서 그들이 만난 화복禍福이 이와 같음에 느낌이 있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 일을 쓰는 것이니, 후세의 군자들은 살펴볼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