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에 子胥與孫武興兵하야 及唐蔡伐楚하야 夾漢水而陣하야 楚大敗라
於是에 吳王이 乘勝而前하야 五戰에 遂至郢하니 楚昭王이 出亡이어늘
乃掘平王墓하야 出其尸하야 鞭之三百하야 以報父兄之讐하니라
以三諫不去
하고 으로 爲子胥之罪
하고 以不彊諫句踐
하야 而棲之會稽
로 爲種蠡之過
라
三諫而去
는 爲人臣交淺者言也
니 如
는 乃可耳
어니와 이라 與國存亡者也
니 去將安往哉
리오
生則斬首하고 死則鞭尸하야 發其至痛하야 無所擇也라
是以로 昔之君子 皆哀而恕之어늘 雄은 獨非人子乎아
句踐이 困於會稽하고 乃能用二子하니 若先戰而彊諫以死之면 則雄은 又當以子胥之罪로 罪之矣리라
초 평왕楚 平王이 오사伍奢와 오상伍尙을 죽이자, 오자서伍子胥가 오吳나라로 망명하여 오왕 합려吳王 闔閭를 섬겼는데, 초 평왕楚 平王이 죽고 아들 소왕昭王이 즉위하였다.
뒤에 오자서伍子胥는 손무孫武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당唐나라와 채蔡나라와 함께 초楚나라를 공격하면서 한수漢水를 끼고 진陣을 치고 싸워서 초楚나라를 대파하였다.
이에 오왕吳王이 승세를 타고 전진하여 다섯 번 싸워 모두 승리하고 마침내 초楚나라 도성인 영郢 땅에 이르니, 초 소왕楚 昭王이 도성을 빠져나가 도망하였다.
오吳나라 군대가 영郢 땅에 입성하자, 자서子胥가 소왕昭王을 찾았으나 이미 잡을 수가 없었다.
이에 평왕平王의 묘를 파서 시신을 꺼내 채찍 300대를 때려 부형父兄의 원수를 갚았다.
오자서伍子胥와 문종文種과 범려范蠡는 모두 인걸人傑이었는데, 양웅揚雄은 고루한 선비였다.
자신의 하찮은 학식을 가지고 이 세 사람의 하자瑕疵를 트집잡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세 번 간하고도 떠나가지 않은 것과, 평왕平王의 시신에 채찍질한 것과, 왕의 관사를 차지하여 거처한 것을 가지고 오자서伍子胥의 죄로 삼았으며, 구천句踐에게 강력히 간하지 않아서 궁지에 몰려 회계산會稽山에 머물게 된 것을 가지고 문종文種과 범려范蠡의 죄로 삼았다.
양웅揚雄은 옛날에 “〈군주에게 잘못이 있으면 신하가〉 세 번 간諫하고는 마땅히 떠나가야 한다.”는 말이 있음을 듣고는, 즉시 이것을 가지고 천하의 선비들을 다스리고자 하였으니, 어찌 고루하지 않겠는가?
세 번 간하고 떠나가는 것은 인신人臣으로서 군주君主와의 교분이 얕은 자를 위하여 말한 것이니, 궁지기宮之奇와 설야洩冶와 같은 사람들은 떠나가도 괜찮지만, 오자서伍子胥와 같은 경우는 오吳나라의 종신宗臣으로 국가와 존망을 함께하는 자이니, 가면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
백 번 간하여 듣지 않으면 죽음으로써 뒤를 잇는 것이 옳은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노魯나라를 떠나가실 적에 일찍이 한 번도 간諫하지 않으셨으니, 또 어찌 세 번 간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으면 자식이 복수하는 것은 예禮이다.
원수가 살아 있으면 그 목을 베고 원수가 죽었으면 시신을 채찍질하여, 그 지극한 애통을 발설하여 가릴 것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옛날 군자君子들이 모두 오자서伍子胥를 가엾게 여기고 용서해주었는데, 양웅揚雄은 홀로 사람의 자식이 아니란 말인가?
초왕楚王의 관사를 차지하여 거처한 것은, 이는 오왕 합려吳王 闔閭와 여러 신하들의 잘못이지 오자서伍子胥의 뜻이 아니었다.
구천句踐이 회계산會稽山에서 곤궁에 처하고서야 비로소 두 사람(문종文種과 범려范蠡)의 말을 따랐으니, 만약 이 전쟁에 앞서서 두 사람이 강력히 간諫하다가 죽었더라면 양웅揚雄은 또다시 오자서伍子胥의 죄로써 이들을 죄주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