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之末
로 至於戰國
히 하야 自
,
,
之流
로 下至
之徒
히 하야 靡衣玉食以館於(上)[舍]者
를 何可勝數
리오
越王句踐
은 有君子六千人
하고 는 皆有客三千人
이로되 而田文
은 하고 이며 이 皆致客無數
라
下至秦漢之間
하야도 號多士
하야 賓客廝養
이 皆天下豪傑
이요 而
亦有士五百人
이라
其略見於傳記者 如此하니度其餘하면 當倍官吏而半農夫也라
國之有姦也는 猶鳥獸之有猛鷙와 昆蟲之有毒螫也니 區處條理하야 使各安其處는 則有之矣어니와 鋤而盡去之는 則無是道也라
吾考之世變하야 知六國之所以久存과 而秦之所以速亡者 蓋出於此하니 不可以不察也니라
夫智, 勇, 辯, 力 此四者는 皆天民之秀傑者也라
故로 先王이 分天下之富貴하야 與此四者共之하시니 此四者不失職이면 則民靖矣라
四者雖異
나 先王
이 因俗設法
하야 使出于一
하니 三代以上
은 出於學
하고 戰國至秦
은 出於客
하고 漢以後
는 出於郡縣吏
하고 魏晉以來
는 出於
하고 隋唐至今
은 出於科擧
하니 雖不盡然
이나 取其多者論之
라
然이나 當是時하야 百姓無一人叛者는 以凡民之秀傑者를 多以客養之하야 不失職也일새라
雖欲怨叛이나 而莫爲之先하니 此其所以少安而不卽亡也니라
러니 旣幷天下
에는 則以客爲無用
하야 於是
에 任法而不任人
하야
謂民可以恃法而治라하고 謂吏不必才取요 能守吾法而已라
故로 墮(隳)名城하고 殺豪傑하야 民之秀異者 散而歸田畝하니 向之食於四公子, 呂不韋之徒者 皆安歸哉아
秦之亂이 雖成於二世나 然使始皇이 知畏此四人者하야 有以處之하야 使不失職이런들 秦之亡이 不至若是速也리라
縱百萬虎狼於山林하야 而饑渴之하고 不知其將噬人하니 世以始皇爲智는 吾不信也로라
楚漢之禍
에 生民盡矣
니 豪傑宜無幾
어늘 而代相
從車千乘
이로되 蕭, 曹爲政
에 莫之禁也
하고
至文, 景, 武之世
하야 法令至密
이나 然
之流 皆爭致賓客
이로되 世主不問也
하니
豈懲秦之禍하야 以爲爵祿不能盡縻天下士라 故로 少寬之하야 使得或出於此也邪아
혹자는 당唐나라 말기의 방훈龐勛과 오대시대五代時代의 번약수樊若水 같은 사람이 모두 세객說客으로 유세游說하는 부류라고 한다.
춘추시대 말엽으로부터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제후諸侯와 경상卿相들이 모두 다투어 선비를 길러서 모부謀夫와 세객說客, 하늘을 말하고 용龍을 조각하고 견백동이堅白同異를 말하는 부류로부터 아래로 검劍으로 치고 구정九鼎을 들어 올리고 닭 울음소리를 흉내내고 개처럼 도둑질을 잘하는 무리에 이르기까지 빈객賓客으로 예우하지 않음이 없어서, 화려한 옷을 입고 쌀밥을 먹고 좋은 집에 거주한 자를 어찌 이루 다 셀 수 있었겠는가?
월왕 구천越王 句踐은 군자君子(문객門客) 6천 명이 있었고, 위魏나라의 무기無忌(신릉군信陵君)와 제齊나라의 전문田文(맹상군孟嘗君)과 조趙나라의 조승趙勝(평원군平原君)과 초楚나라의 황헐黃歇(춘신군春申君)과 진秦나라의 여불위呂不韋는 모두 문하門下에 3천 명의 식객食客이 있었는데, 그중에 전문田文은 임협任俠과 간인姦人 6만 가호를 자기 식읍食邑인 설읍薛邑으로 초치하였고 제齊나라 직하稷下 지방에 세객說客들이 또한 1천 명에 이르렀으며, 위魏나라 문후文侯와 연燕나라 소왕昭王, 연燕나라 태자 단太子 丹이 빈객賓客을 초치한 것이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후로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서도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문하門下에 선비가 많기로 이름나서 빈객賓客과 노복奴僕들도 모두 천하의 호걸이었고, 전횡田橫 또한 선비 5백 명이 있었다.
전기傳記에 대략 보이는 것이 이와 같으니, 그 나머지를 헤아려보면 그 숫자가 마땅히 관리의 갑절이 되고 농부의 절반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간사한 백성으로 나라를 좀먹는 자들이니, 〈이들이 이렇게 많고서〉 백성들이 어떻게 지탱하며 나라가 어떻게 감당하였겠는가?
나라에 간사한 백성이 있는 것은 새와 짐승 중에 맹수猛獸와 맹금猛禽이 있고 곤충 중에 독충毒蟲이 있는 것과 같으니, 조리에 맞게 잘 대처해서 각각 그 자리를 편안히 하게 하는 경우는 있지만, 이것을 제거해서 모두 없애는 그런 방도는 없는 것이다.
내가 세상의 변고를 고찰하여 육국六國이 오랫동안 보존한 이유와 진秦나라가 속히 멸망한 이유가 다 여기에서 나왔음을 알았으니, 이것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지혜와 용맹, 구변과 힘을 가진 네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하늘이 낸 사람 중에 빼어나고 걸출한 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스스로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먹어 남을 기르지 못하고, 모두 남을 부려서 자신을 기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천하의 부귀를 나누어 이 네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하셨으니,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이 직책을 잃지 않고 길러짐이 있으면 백성들이 안정된다.
네 부류의 사람들은 행위가 비록 다르나 선왕先王이 풍속을 따라 법을 만들어서 이들로 하여금 한 길로 나오게 하였으니, 삼대三代 이상은 학문學問에서 나오고, 전국시대로부터 진秦나라에 이르기까지는 세객說客에서 나오고, 한漢나라 이후는 군현郡縣의 관리官吏에서 나오고, 위魏․진晉 이래로는 구품중정九品中正에서 나오고, 수隋․당唐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과거科擧에서 나왔으니, 이는 비록 모두 그렇지는 않으나 그중에 많은 것을 취하여 논한 것이다.
육국六國의 군주들이 백성들을 모질게 부린 것이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와 이세황제二世皇帝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를 당하여 백성 중에 한 사람도 배반한 자가 없었으니, 이는 평민 중에 빼어나고 걸출한 자들을 대부분 식객食客으로 길러서 직책을 잃지 않게 했기 때문이었다.
농사에 힘써서 윗사람을 받드는 것은 모두 용렬하고 노둔하여 무슨 일을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조정을 원망하여 배반하고자 하나 자신들을 위해서 앞장서줄 자들이 없으니, 이것이 나라가 다소 편안하여 즉시 망하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
시황제始皇帝가 처음에 객客을 축출하고자 하다가 이사李斯의 말을 듣고서 중지하였는데, 천하를 병합하고 나서는 객客을 쓸모없다고 여겨서 마침내 법에 맡기고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황제始皇帝는 법만 있으면 백성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관리는 굳이 인재를 취할 필요가 없고 나라의 법을 잘 지키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유명한 성城을 허물고 호걸들을 죽여서 백성들 중에 빼어나고 특이한 자들이 흩어져 전묘田畝로 돌아갔으니, 지난날 네 명의 공자公子와 여불위呂不韋에게 얻어먹던 무리들이 다 어디로 돌아갔겠는가?
이들이 참으로 목이 비쩍 마르고 얼굴이 부황으로 누렇게 뜬 채 포갈布褐로 늙어 죽었을 것인가?
아니면 장차 밭 가는 것을 그만두고 크게 탄식하면서 때를 기다렸겠는가?
진秦나라의 혼란이 비록 이세황제二世皇帝 때에 이루어졌으나, 만일 시황제始皇帝가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을 두려워할 줄 알아서 이들을 잘 대처하여 이들로 하여금 직책을 잃지 않게 했더라면, 진秦나라가 이처럼 빠르게 멸망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만 마리의 호랑이와 이리를 산림에 풀어놓아 굶주리고 목마르게 하고서 이들이 장차 사람을 물어 죽일 줄을 알지 못했으니, 세상에서 시황제始皇帝를 지혜롭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초楚나라와 한漢나라의 병화兵禍에 백성들이 거의 다 없어졌으니, 마땅히 호걸들도 거의 다 없어졌을 것이나, 대왕代王의 정승인 진희陳豨는 따르는 수레가 천승千乘이었는데도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정사政事를 펼 적에 이것을 금하지 않았다.
문제文帝․경제景帝․무제武帝의 세상에 이르러 법령이 지극히 엄밀하였으나, 오왕 유비吳王 劉濞와 회남왕淮南王(유안劉安)과 양왕梁王(유무劉武), 위기후魏其侯(두영竇嬰)와 무안후武安侯(전분田蚡)의 무리들이 모두 다투어 빈객을 초청하였는데도 군주가 이것을 묻지 않았다.
이는 어찌 진秦나라의 화禍를 경계로 삼아 작록爵祿으로는 천하의 선비를 다 얽어맬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다소 늦춰주어 이들로 하여금 혹 이 길로 나오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선왕先王의 정사로 말하면 그렇지 않아서, 〈공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군자君子가 도道를 배우면 인민을 사랑하고, 소인小人이 도道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라고 하였으니, 아!
이것이 어찌 진秦나라와 한漢나라가 미칠 바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