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子之所以聖은 不盡於用魯하니 而子瞻於孔子之用魯에 已見得 分明하니라
에 孔子言於公曰
이라하시고 하야 將
한대 於是
에 하다
季氏之忌克忮害如此하니 雖地勢不及曹氏나 然君臣相猜는 蓋不減操也라
考於春秋하면 方是時하야 三桓雖若不悅이나 然莫能違孔子也라
以爲孔子用事於魯하야 得政與民하야 而三桓畏之歟인댄
요 三桓不臣
이면 則魯無可治之理
라 孔子之用於世
에 其政
이 無急于此者矣
라
嬰能知之
로되 而莫能爲之
하니 嬰非不賢也
나 不及孔子也
라
孔子以
으로 得政期月
에 而能擧治世之禮
하야 以律亡國之臣
하시고 墮名都
하고 出藏甲
이로되 而三桓不疑其害己
하니 此必有不言而信
하고 不怒而威者矣
시니라
嬰之用於齊也에 久於孔子하고 景公之信其臣也 愈於定公이로되 而田氏之禍 不少衰하니 吾是以로 知孔子之難也로라
吾是以로 知孔子之欲治列國之君臣하야 使如春秋之法者 至於老且死而不忘也로라
或曰 孔子知哀公與三子之必不從이로되 而以禮告也歟인저 曰 否라
孔子旣告公한대 公曰 魯爲齊弱이 久矣니 子之伐之 將若之何오
對曰 陳恒弑其君에 民之不予者半이니 以魯之衆으로 加齊之半이면 可克也라하시니 此豈禮告而已哉리오
若從孔子而伐齊면 則凡所以勝齊之道를 孔子任之有餘矣시리라
旣克田氏하면 則魯之公室이 自張이요 三桓이 不治而自服也리니 此孔子之志也시니라
공자孔子가 성聖스러운 이유는 노魯나라에서 쓰기를 다하지 않은 데에 있었으니, 자첨子瞻은 공자孔子가 노魯나라에서 쓰여짐에 대해 이미 분명히 알고 있었다.
노 정공魯 定公 12년(B.C. 498)에 공자孔子께서 정공定公에게 말씀하시기를 “신하는 사병을 거느릴 수 없고, 대부大夫는 100치雉의 높은 성城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시고, 중유仲由로 하여금 계씨季氏의 재宰가 되게 하여 장차 삼가三家의 도성을 허물려 하시자, 이에 호응하여 숙손씨叔孫氏가 맨 먼저 자기 식읍인 후읍郈邑의 성을 허물었다.
계손씨季孫氏가 장차 자신의 식읍인 비읍費邑의 성을 허물려고 하였는데, 공산불뉴公山弗狃와 숙손첩叔孫輒이 비읍費邑 백성들을 거느리고 정공定公을 습격하자, 공公이 삼자三子와 함께 계손씨季孫氏의 집으로 들어가 피하였다.
공자孔子가 신구수申句須와 악기樂頎에게 명하여 내려가서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비읍費邑 사람들이 패하여 공산불뉴公山弗狃와 숙손첩叔孫輒 두 사람이 제齊나라로 도망하니, 마침내 비읍費邑의 성城을 허물었다.
장차 맹손씨孟孫氏의 식읍인 성읍成邑의 성을 허물려 했는데, 공렴처보公斂處父가 성읍成邑을 들어 배반하므로 정공定公이 성읍成邑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공융孔融이 말하기를 ‘옛날에 왕기王畿는 1천 리였는데, 왕기王畿 안에는 제후를 봉건封建하지 않았다.’라고 하자, 조조曹操는 공융孔融이 봉건封建을 논한 것이 점점 확대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공융孔融을 죽였다.
공융孔融은 다만 입으로 말했을 뿐이니, 어찌 이것을 시행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조조曹操는 천자天子가 1천 리의 기내畿內를 보유하면 장차 자기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계손씨季孫氏는 직접 소공昭公을 축출하여 소공昭公이 국외에서 죽었고, 공公을 따르던 자들이 모두 감히 입국하지 못해서 자가기子家羈조차 망명하였다.
계손씨季孫氏가 남을 시기하고 이기려 하고 해치려 함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지위와 형세는 조씨曹氏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군신간에 서로 시기한 것은 조조曹操보다 덜하지 않았다.
공자孔子가 어찌 이때에 그 유명한 도성都城을 허물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를 내놓게 할 수 있었겠는가?
《춘추春秋》를 살펴보면, 이때 삼환三桓은 공자孔子의 주장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공자孔子의 뜻을 어기지 못한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공자孔子께서 이때 노魯나라의 국정國政을 집행하면서 정권과 민심을 장악하여 삼환三桓이 두려워하였다면,
계환자季桓子가 여자 악사樂士들을 받았을 적에 공자孔子께서 이를 물리치지 못하시고 탄식하며 노래하시기를 ‘저 여인의 입이 군주를 도망가게 할 수 있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공자孔子께서 계손씨季孫氏를 두려워한 것이고 계손씨季孫氏가 공자孔子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다.
공자孔子께서는 어찌 우선 정사政事와 형벌을 닦으면서 삼환三桓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를 기다리지 않으셨는가?”
이것이 공자孔子께서 성인聖人이 되신 이유이다.
제齊나라의 전씨田氏와 진晉나라의 육경六卿이 복종하지 않으면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는 망하지 않을 방도가 없고, 노魯나라의 삼환三桓이 신하 노릇하지 않으면 노魯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이치가 없으니, 공자孔子께서 이때에 등용되심에 정사政事 중에 이보다 더 시급한 것이 없었다.
저 안영晏嬰이란 자도 이것을 알아서 말하기를 “오직 예禮만이 전씨田氏의 참람함을 그치게 할 수 있으니, 정사政事를 예禮에 맞게 하면 대부大夫의 집에서 베푸는 것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고 대부大夫가 나라의 이익을 취하지 않게 됩니다.”라고 하자, 제 경공齊 景公이 “훌륭한 말이다!
나는 지금에야 예禮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음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안영晏嬰은 이것을 알았으나 능히 시행하지는 못하였으니, 그가 어질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정직함으로써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고 해치지 않아서 천지의 사이에 꽉 차게 함에 있어서는 공자孔子에게 미치지 못한 것이다.
공자孔子는 기려羈旅의 신하로 1년 동안 정권을 잡자, 능히 치세治世의 예禮를 들어서 나라를 망치는 간신들을 다스리셨으며 삼환三桓의 유명한 도성을 허물고 사사로이 거느리고 있는 군대를 내놓게 하셨으나, 삼환三桓들이 자신들을 해치는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말씀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믿고 노여워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두려워함이 있었던 것이다.
공자孔子의 성聖스러움이 행하신 일에 나타남이 이에 이르러서 의심할 것이 없는 것이다.
안영晏嬰이 제齊나라에 등용된 것은 공자孔子보다 훨씬 오랫동안이었고 경공景公이 안영晏嬰을 믿은 것은 정공定公보다 더하였는데, 전씨田氏의 화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니, 나는 이 때문에 공자孔子께서 하신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공자孔子께서는 애공哀公 16년에 별세하셨는데, 14년에 진항陳恒이 그 군주를 시해하자, 공자孔子께서 목욕하고 조회하여 애공哀公에게 아뢰어서 진항陳恒을 토벌할 것을 청하셨으니,
나는 이로써 ‘공자孔子께서 열국列國의 군신들을 다스려 장차 춘추春秋의 법과 같이 하려고 하신 것이 늙어서 장차 죽음에 이르도록 잊지 못하셨음’을 아는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공자孔子께서 애공哀公과 삼자三子(삼환三桓)가 반드시 따르지 않을 줄을 아시면서 단지 예禮로써 고하신 것이다.”라고 하는데, 나는 “아니다.
공자孔子께서 실로 제齊나라를 정벌하고자 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공자孔子께서 애공哀公에게 진항陳恒을 토벌할 것을 청하자, 애공哀公이 묻기를 “노魯나라가 제齊나라보다 약한 것이 오래인데, 선생께서 제나라를 치려는 것은 장차 어찌하려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孔子께서 대답하시기를 “진항陳恒이 군주를 시해함에 제齊나라 백성 중에 찬성하지 않는 자가 절반이니, 노魯나라의 병력에다가 제齊나라의 절반의 백성을 더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그냥 예禮로써 하신 것일 뿐이겠는가?
애공哀公이 삼환三桓의 핍박을 근심하여 일찍이 월越나라의 힘을 빌려 노魯나라를 쳐서 이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오랑캐 나라의 힘을 빌려 자기 나라를 정벌하면 백성들이 찬성하지 않으니, 이것은 위衛나라 고여皐如와 출공出公의 일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공자孔子의 말씀을 따라서 제齊나라를 정벌하는 것만 하였겠는가?
만약 공자孔子의 말씀을 따라서 제齊나라를 정벌했다면 제齊나라를 이길 수 있는 모든 방도를 공자孔子께서 책임지시고도 남았을 것이다.
전씨田氏를 이기고 나면 노魯나라의 공실公室이 저절로 강성해지고 삼환三桓이 죄를 다스리지 않아도 스스로 복종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공자孔子의 본뜻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