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下苦其難而莫之能用也하니 不知夫子之有以貫之也라
是故
로 堯, 舜, 禹, 湯, 文, 武, 周公之法度禮樂刑政
과 與當世之賢人君子百家之書
와 百工之技藝
와 九州之內, 四海之外,
之事
로 荒忽誕謾而不可考者 雜然皆列乎胸中
이로되 而有卓然不可亂者
는 此固有以一之也
일새라
是以로 博學而不亂하고 深思而不惑하시니 非天下之至精이면 其孰能與於此리오
蓋嘗求之於
하야 至於詩與春秋之際而後
에 知聖人之道始終本末
이 各有條理
로라
天下固知有父子也하니 父子不相賊이면 而足以爲孝矣요 天下固知有兄弟也하니 兄弟不相奪이면 而足以爲悌矣라
孝悌足而王道備하니 此固非有深遠而難見하고 勤苦而難行者也라
故로 詩之爲敎也는 使人歌舞佚樂하야 無所不至로되 要在於不失正焉而已矣라
雖然이나 聖人이 固有所甚畏也하니 一失容者는 禮之所由廢也요 一失言者는 義之所由亡也니
君臣之相攘하고 上下之相殘하야 天下大亂이 未嘗不始於此道라
是故로 春秋는 力爭於毫釐之間하고 而深明乎疑似之際하야 截然其有所必不可爲也하니 不觀於詩면 無以見王道之易요 不觀於春秋면 無以知王政之難이니라
故로 其言이 無有統要하니 若孟子는 可謂深於詩而長於春秋者矣라
其道始於至粗而極於至精하야 充乎天地하고 放乎四海하야 而毫釐有所必計하야 至寬而不可犯하고 至密而可樂者에 此其中은 必有所守어늘 而後世或未之見也니라
士未可以言而言이면 是以言餂之也요 可以言而不言이면 是以不言餂之也니 是皆穿窬之類也라하시니
唯其不爲穿窬也면 而義至於不可勝用이니 唯其未可以言而言하고 可以言而不言也면 而其罪遂至於穿窬라
故로 曰 其道始於至粗而極於至精하야 充乎天地하고 放乎四海하야 而毫釐有所必計라하노니
이 글은 장공長公의 평소 실력을 다하지 못한 듯하다.
옛날에 중니仲尼(공자孔子)께서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오시자, 예전에 들으셨던 삼대三代의 제도를 망라하여 기록하셨으니, 경례經禮 3백 가지와 곡례曲禮 3천 가지는 너무 많아서 종신토록 그 설을 다 연구할 수 없는 것이다.
부자夫子께서 자공子貢에게 이르시기를 “사賜(자공子貢)야.
너는 나를 많이 배워서 기억하는 자라고 여기느냐?
나는 한 가지 이치가 만사를 꿰뚫었다.”라고 하셨다.
천하 사람들이 그 어려움을 괴로워하여 능히 활용하지 못하니, 부자夫子께서 한 가지 이치로써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요堯․순舜과 우禹․탕湯,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의 법도法度와 예악禮樂과 형정刑政과 당세의 현인賢人․군자君子의 백가百家의 책과 백공百工들의 기예技藝와 구주九州의 안, 사해四海의 밖, 구이九夷와 팔만八蠻의 일로써 막연하고 허탄하여 상고할 수 없는 여러 가지가 이것저것 뒤섞여서 모두 공자孔子의 가슴속에 나열되어 있었으나 우뚝하여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이는 진실로 하나의 이치가 꿰뚫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박학하여도 어지럽지 않고 깊이 생각하여도 의혹하지 않으셨으니, 천하에 지극히 정밀한 자가 아니라면 그 누가 여기에 참여하겠는가?
내 일찍이 육경六經에서 이것을 찾아 《시경詩經》과 《춘추春秋》에 이른 뒤에야 성인聖人의 도道에 시始와 종終, 본本과 말末이 각각 조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왕화王化의 근본은 천하 사람들이 행하기 쉬운 데서 시작되었다.
천하 사람들은 진실로 부자간이 있는 줄을 아나니 부자간이 서로 해치지 않으면 충분히 효도가 될 수 있고, 천하 사람들은 진실로 형제간이 있음을 아나니 형제간이 서로 빼앗지 않으면 충분히 공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효제孝悌가 충분하면 왕도王道가 구비되니, 이것은 진실로 심원하여 보기 어렵고 몹시 괴로워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詩의 가르침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무歌舞를 하며 편안하고 즐거워하여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게 하면서도 요점은 바름을 잃지 않게 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인聖人은 진실로 매우 두려워하신 바가 있었으니, 이는 용모를 한 번 잃음으로 말미암아 예禮가 폐해지고, 말을 한 번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의義가 없어지는 것이다.
군주와 신하가 서로 빼앗고 위아래가 서로 해쳐서 천하의 큰 혼란이 일찍이 여기에서 시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춘추春秋》는 털끝만 한 사이를 강력히 다투고 유사한 사이를 깊이 밝혀서 엄격하여 반드시 할 수 없는 바가 있었으니, 《시경詩經》을 보지 않으면 왕도王道의 쉬움을 알 수 없고, 《춘추春秋》를 보지 않으면 왕정王政의 어려움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공자孔子가 별세하신 뒤에 여러 제자들은 자신들이 각기 들은 것을 가지고 책을 지었으나 모두 그 원류源流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말이 통기統紀와 요점이 없는데, 맹자孟子로 말하면 《시경詩經》에 조예가 깊고 《춘추春秋》에 뛰어난 분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 도道가 지극히 거친 데서 시작하여 지극히 정밀한 데까지 이르러서 천지天地에 충만하고 사해四海에 도달하여, 털끝만 한 것도 반드시 따지는 바가 있어서 지극히 너그러우면서도 범할 수 없고 지극히 치밀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으니, 이는 그 마음속에 반드시 지키는 바가 있어 그러한 것인데, 후세에서는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
또 맹자孟子는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남을 해치려고 하지 않는 마음을 채운다면 인仁을 이루 다 쓰지 못할 것이며, 사람이 남의 집 담을 뚫거나 넘어가서 도둑질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채운다면 의義를 이루 다 쓰지 못할 것이다.
선비가 말해서는 안 될 적에 말한다면 이는 말로써 물건을 핥아(훔쳐)먹는 것이요, 말을 해야 할 적에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물건을 핥아먹는 것이니, 이는 모두 남의 집 담을 뚫거나 넘어가서 도둑질하는 종류이다.”라고 하셨다.
오직 남의 집 담을 뚫거나 담을 넘어가 도둑질하지 않으면 의義를 이루 다 쓰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니, 오직 말을 해서는 안 될 적에 말하고 말을 해야 할 적에 말하지 않으면, 그 죄가 마침내 남의 집 담을 뚫고 담을 넘어가 도둑질하는 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도道가 지극히 거친 데서 시작하여 지극히 정밀한 데까지 이르러 천지에 충만하고 사해에 도달하여, 털끝만 한 것도 반드시 따지는 바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이 맹자孟子가 맹자孟子가 되신 이유일 것이다.
후세에 맹자孟子를 보려는 자들은 다른 것을 보지 말고 또한 이것을 볼 뿐이다.
소씨 부자蘇氏 父子는 성학聖學과 노씨老氏의 학문에 대하여 모두 제대로 통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문장을 써 내려간 곳은 특별히 원만하다.
당형천唐荊川은 평하기를 “이 편은 제멋대로 방종하여 얽매이지 않았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