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人之道를 有趍其名而好之者하고 有安其實而樂之者라
珠璣象犀를 天下莫不好하야 奔走出力하야 爭鬪奪取하니 其好之不可謂不至也라
然이나 不知其所以好之之實이요 至於粟米蔬肉桑麻布帛하야는 天下之人이 內之於口하야 而知其所以爲美하고 被之於身하야 而知其所以爲安하니 此는 非有所役乎其名也라
韓愈之於聖人之道에 蓋亦知好其名矣요 而未能樂其實하니 何者오
其爲論甚高하야 其待孔子, 孟軻甚尊이요 而拒楊, 墨, 佛, 老甚嚴하니 此其用力이 亦不可謂不至也라
然이나 其論이 至於理而不精하고 支離蕩佚하야 往往自叛其說而不知하니라
蓋亦曰 夫子循循焉善誘人이라하니 由此觀之하면 聖人之道는 果不在於張而大之也니라
是故로 聖人이 一視而同仁하고 篤近而擧遠이라하니라
夫聖人之所爲異乎墨者는 以其有別焉耳어늘 今愈之言曰 一視而同仁이라하니
則是는 以待人之道로 待夷狄하고 待夷狄之道로 待禽獸也니 而可乎아
不薄其禮而致其情하고 不責其去而厚其來는 是待夷狄之仁也요
殺之(有)[以]時하고 而用之有節은 是待禽獸之仁也니
儒墨之相戾 不啻若胡越이로되 而其疑似之間에 相去不能以髮이니 宜乎愈之以爲一也니라
神不可知어늘 而祭者之心이 以爲如其存焉이면 則是孔子不明鬼也시니라
儒者之患은 患在於論性하야 以爲喜怒哀樂이 皆出於情이요 而非性之所有니라
夫有喜有怒而後에 有仁義하고 有哀有樂而後에 有禮樂하니 以爲仁義禮樂이 皆出於情而非性이라하면 則是相率而叛聖人之敎也니라
아하니 喜怒哀樂
이 苟不出乎性而出乎情
이면 則是相率而爲老子之嬰兒也
니라
君子之爲學에 知其人之所長하고 而不知其弊하면 豈可謂善學耶리오
唐荊川曰 此文이 截然四段이로되 而綱整目亂하니라
細觀此文體
하면 乃絶是模擬
爲之
니 坡翁之滑稽若此
하니라
予竊以愈之闢佛老也
는 特其門戶之間
이어늘 而東坡所論
도 亦猶
이니라
앞뒤 몇 단락을 각각 따로 말하였으나 강령綱領과 조목條目이 정연하다.
성인聖人의 도道를 그 이름만 따라 좋아하는 자가 있고, 그 실제[실實]를 편안히 여겨서 즐거워하는 자가 있다.
진주와 구슬과 상아象牙와 서각犀角을 천하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분주히 힘을 다해 다투고 빼앗아 취하니, 그 좋아함이 지극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좋아하는 바의 실제는 알지 못하며, 곡식과 쌀, 채소와 고기, 뽕나무와 삼베와 명주베에 이르러서는 천하 사람들이 이것을 입에 넣어서 아름다운 음식이 되는 것을 알고 몸에 입어서 편안함이 됨을 아니, 이것은 실제를 따르는 것이요 그 이름[명名]에 힘쓰는 것이 아니다.
한유韓愈는 성인聖人의 도道에 있어서 또한 그 이름만을 좋아할 줄 알고 그 실제를 좋아하지는 못했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그가 논한 것이 매우 높아서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대한 것은 매우 높았고, 양주楊朱와 묵적墨翟, 불교佛敎와 노장老莊을 배척한 것은 매우 엄격하였으니, 이 또한 그가 힘쓴 것이 지극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의논이 이치를 말함에 있어서는 정밀하지 못하며 지리하고 방탕하여 왕왕 스스로 자기 주장에 위배되면서도 알지 못하였다.
옛날 재아宰我와 자공子貢과 유약有若은 번갈아 스승(공자孔子)을 칭송하여, 생민生民이 있은 이래로 부자夫子(공자孔子)처럼 성대盛大한 분은 있지 않다고 말하여, 비록 요堯․순舜의 어짊으로도 또한 미치지 못하는 바라고 하였으니, 공자孔子의 도道를 높이고 배우기를 좋아함이 또한 이미 지극하였다.
그러나 군자들이 이것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여 말하기를 “재아宰我와 자공子貢과 유약有若은 그 지혜가 성인聖人의 낮은 경지만을 알기에 충분할 뿐이었다.”라고 하였다.
안연顔淵으로 말하면 어찌 또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겠는가?
안연顔淵은 말하기를 “부자夫子께서는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끄셨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관찰하면 성인聖人의 도道는 과연 과장하여 크게 하는 데 달려 있지 않은 것이다.
한유韓愈란 자는 그 이름만을 좋아할 줄 알고 그 실제는 즐거워하지 못한 자이다.
한유韓愈의 〈원인原人〉에 이르기를 “하늘은 해와 달과 성신星辰의 주인이고, 땅은 산천山川과 초목草木의 주인이고, 사람은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주인이니, 주인으로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를 포악하게 하면 주인 된 도리를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한결같이 보아 똑같이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을 돈독히 하면서도 먼 사람을 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인聖人이 묵적墨翟과 다른 까닭은 그 분별이 있기 때문인데, 지금 한유韓愈의 말에 이르기를 “한결같이 보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사람을 대하는 도道를 가지고 이적夷狄을 대하는 것이고, 이적夷狄을 대하는 도道를 가지고 금수禽獸를 대하는 것이니, 이것이 옳겠는가?
사람을 가르쳐서 그로 하여금 능함이 있게 하고, 사람을 교화해서 그로 하여금 앎이 있게 하는 것은, 이는 사람을 대하는 인仁이다.
그 예禮를 박하지 않게 하고 그 정情을 지극히 하며, 가는 것을 꾸짖지 않고 오는 것을 후대함은, 이는 이적夷狄을 대하는 인仁이다.
죽이는 데에 때가 있고 쓰는 데에 절도가 있는 것은, 이는 금수禽獸를 대하는 인仁이다.
유자儒子와 묵자墨子가 서로 다른 것이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월越 지방과 같을 뿐만이 아니나, 그 비슷한 사이에 서로의 차이는 털끝 하나도 되지 못하니, 한유韓愈가 이것을 똑같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 것은 당연한 듯하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인자仁者를 친근히 해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인자仁者를 친근히 해야 한다면 이것은 공자께서 겸애兼愛하지 않은 것이요,
선조先祖를 제사할 적에는 선조先祖가 계신 것처럼 하셨고 귀신鬼神을 제사할 적에는 귀신鬼神이 계신 것처럼 하셨으니,
귀신鬼神은 알 수 없는데 제사하는 자의 마음에 귀신鬼神이 계신 것처럼 여긴다면, 이는 공자孔子께서 귀신鬼神을 밝히지 않으신 것이다.
유자儒者의 병통은 성性을 논하여 이르기를 “희喜, 노怒, 애哀, 악樂은 모두 정情에서 나오고 성性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기쁨이 있고 노여움이 있은 이후에 인의仁義가 있고, 슬픔이 있고 즐거움이 있은 이후에 예악禮樂이 있으니, 인의仁義와 예악禮樂이 모두 정情에서 나오고 성性이 본래 소유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사람들을 서로 이끌고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행위이다.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능히 갓난아기와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희喜, 노怒, 애哀, 악樂이 만일 성性에서 나오지 않고 정情에서 나온다면, 이는 사람들을 서로 이끌고 노자老子의 갓난아기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자儒者 중에 혹자는 말하기를 “노역老易이다.”라고 하니, 《주역周易》이 어찌 노자老子의 무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런데도 유자儒者들이 심지어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가지고 《주역周易》을 설명하기까지 하니, 이것은 성性을 분리하여 정情으로 삼는 것이니, 그 병폐가 진실로 여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군자가 학문을 할 적에 그 사람의 장점만을 알고 그 병폐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 이것을 잘 배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당형천唐荊川이 말하기를 “이 문장은 분명히 네 단락인데, 강령綱領은 정돈되었으나 조목條目은 혼란스럽다.
이 문체를 자세히 관찰하면 바로 〈원도原道〉를 크게 모의模擬하여 지은 것이니, 동파옹東坡翁의 익살스러움이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한유韓愈가 불佛․노老를 배척한 것은 다만 그 문호門戶의 사이일 뿐인데, 동파東坡가 논한 것도 여전히 그 문門을 얻지 못하고서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