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進以正이라도 猶且以不正繼之어든 況以不正進者乎아
古之人이 有欲以其君王者也하고 有欲以其君霸者也하고 有欲彊其國者也하니 是三者는 其志不同이라
故로 其術有淺深하고 而其成功有巨細하니 雖其終身之所爲를 不可逆知나 而其大節은 必見於其始進之日하나니라
其中素定也일새니 未有進以彊國而能霸者也요 未有進以霸而能王者也니라
에 其心固曰 使吾君爲堯, 舜之君
하고 而吾民爲堯, 舜之民也
라하니
是故로 上無侈說하고 下無卑論하니 古之人은 其自知明也如此하니라
彼豈不自知其不足以帝且王哉
리오마는 顧其
을 恐孝公之不能從
이라
是故로 設爲高論以眩之하고 君旣不能是矣면 則擧其國하야 惟吾之所欲爲하니
不然이면 豈其負帝王之略하고 而每見에 輒變以徇人乎아
聖人則不然하야 其志愈大故로 其道愈高하고 其道愈高故로 其合愈難이라
聖人이 視天下之不治를 如赤子之在水火也하니 其欲得君以行道가 可謂急矣라
然이나 未嘗以難合之故而少貶焉者는 知其始於少貶이면 而其漸必至陵遲而大壞也라
孔子之世에 其諸侯卿大夫 視先王之禮樂을 猶方圓氷炭之不相入也하니 進而先之以禮樂이면 其不合이 必矣라
是人也는 以道言之하면 則聖人이요 以世言之하면 則野人也라
若夫君子之急於有功者는 則不然하야 其未合也엔 先之以世俗之所好하고 而其旣合也엔 則繼以先王之禮樂하니 其心則然이나 然其進不正하야 未有能繼以正者也라
君子之得其君也에 旣度其君하고 又度其身하야 君能之而我不能이면 不敢進也하고 我能之而君不能이면 不可爲也하니
不敢進而進이면 是易其君이요 不可爲而爲면 是輕其身이니 是二人者는 皆有罪焉이니라
故로 君子之始進也에 曰 君苟用我矣면 我且爲是라하야
君曰 能之라하면 則安受而不辭하고 君曰 不能이라하면 天下其獨無人乎아하며
至於人君하야도 亦然하야 將用是人也엔 則告之以己所欲爲하야 要其能否而責成焉하나니
後之君子는 其進也에 無所不至하야 惟恐其不合也하야 曰 我將權以濟道라하고 旣而요 道卒不行焉이어든 則曰 吾君不足以盡我也라하야
始不正其身
하고 終以謗其君
하니 是人也
는 自以爲君子
나 而
也
니라
시론時論 가운데 매우 묘한 솜씨이니, 그 문체文體와 격식格式이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
군자君子가 천하天下에 훌륭한 일을 하고자 하면, 처음 나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처음에 바름으로써 나아가더라도 바르지 못함으로 뒤를 잇는데, 하물며 바르지 못함으로써 나아가는 자에 있어서이랴?
옛날 사람 중에 자신의 군주를 왕자王者로 만들고자 한 자가 있었고, 자신의 군주를 패자霸者로 만들고자 한 자가 있었고, 나라를 부강富强하게 만들고자 한 자가 있었으니, 이 세 부류의 사람은 그 뜻이 똑같지 않았다.
그러므로 방법에 깊고 얕음이 있었고 공을 세움에 크고 작음이 있었으니, 비록 종신終身토록 할 바를 미리 알 수는 없었으나, 대절大節은 반드시 처음 나아가는 때에 알 수 있었다.
평소 그 마음속에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니,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을 가지고 나아가서 능히 패자霸者가 된 자는 있지 않았고, 패도霸道를 가지고 나아가서 능히 왕자王者가 된 자는 있지 않았다.
이윤伊尹이 유신국有莘國에서 농사지을 적에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우리 임금을 요堯․순舜과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우리 백성을 요堯․순舜의 백성과 같은 선善한 백성으로 만들겠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윤伊尹이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탕湯임금을 설득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국시대의 책사策士들이 자신의 얕은 도량으로 이윤伊尹을 헤아린 것이니, 군자君子들이 이를 미워하였다.
관중管仲이 죄수로서 포승줄에 묶여 있는 가운데에 환공桓公을 만나보았는데, 그가 말한 것은 진실로 제후諸侯를 규합하고 오랑캐들을 물리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관중管仲은 환공桓公이 충분히 패자霸者가 될 수 있음을 헤아렸고, 자신이 충분히 패자霸者의 보좌輔佐가 될 수 있음을 헤아렸다.
이 때문에 위로는 과장된 말이 없었고 아래로는 비굴한 의논이 없었으니, 옛사람은 그 스스로를 분명하게 앎이 이와 같았다.
상앙商鞅은 효공孝公을 알현할 적에 세 번 설득한 뒤에 뜻이 부합하였으니, 심하구나!
상앙商鞅이 속임수를 품고 권모술수를 끼고서 군주를 속임이여.
저 상앙商鞅은 효공孝公이 오제五帝나 삼왕三王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어찌 스스로 알지 못했겠는가마는, 다만 자신의 참혹하고 각박한 형명학刑名學을 효공孝公이 제대로 따르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이 때문에 매우 고상한 삼황三皇․오제五帝의 의논을 가설하여 군주를 현혹시켰고, 군주가 이것을 할 수 없다고 하자 온 진秦나라를 오직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제왕의 경략을 지니고서 매번 군주를 볼 때마다 번번이 자신의 주장을 바꿔서 군주의 비위를 따랐겠는가?
상앙商鞅이 진秦나라에서 끝을 잘 맺지 못한 것은 나아갈 적에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인聖人은 그렇지 않아서, 그 뜻이 더욱 크기 때문에 도道가 더욱 높고, 그 도道가 더욱 높기 때문에 군주와 부합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성인聖人은 천하天下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보기를 어린아이가 물속과 불속에 있는 것처럼 안타깝게 여겼으니, 군주를 얻어서 도道를 행하고자 하는 것이 급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부합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조금도 자신을 굽히지 않았던 것은 조금 굽혀서 시작하면 반드시 점차 침체하여 크게 파괴됨에 이를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먼저 예악禮樂을 올림은 야인野人이요, 나중에 예악禮樂을 올림은 군자君子라 하는데, 만일 내가 쓴다면 나는 먼저 예악禮樂을 올림을 따르겠다.”라고 하신 것이다.
공자孔子 때에 제후諸侯와 경卿․대부大夫들은 선왕先王의 예악禮樂을 보기를 네모진 것과 둥근 것이 서로 맞지 않고 얼음과 숯불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겼으니, 나아가면서 예악禮樂으로써 먼저 한다면 부합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이런 사람은 도道를 가지고 말하면 성인聖人이요, 당시 세상 사람들의 견해를 가지고 말하면 야인野人이다.
군자君子 중에 공功을 세우는 것을 급급히 여기는 자들은 그렇지 않아서 부합하기 전에는 세속의 좋아하는 바로써 먼저 설득하고, 부합한 뒤에는 선왕의 예악禮樂으로써 뒤를 이었으니, 그 마음은 옳으나 그 나아감은 바르지 못하여 바름으로써 계속할 수 있는 자가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따르지 않으셨고, 맹자孟子 또한 말씀하시기를 “한 자를 굽혀서 한 길을 펴는 것은 이익을 가지고 말한 것이니, 만약 이익을 가지고 말한다면 한 길을 굽혀서 한 자를 펴 이롭더라도 또한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신 것이다.
군자君子가 군주의 신임을 얻었을 적에는 군주를 헤아리고 또 자기 자신을 헤아려서, 군주가 능히 이것을 할 수 있는데도 자신이 능하지 못하면 감히 나아가지 않고, 자신이 능히 이것을 할 수 있는데도 군주가 능하지 못하면 이것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능하지 못하여 감히 나아갈 수 없는데 나아간다면 이는 군주를 깔보는 것이요, 군주가 할 수 없는데 한다면 이는 자기 몸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니, 이 두 사람은 모두 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처음 나아갈 적에 생각하기를 ‘임금이 진실로 나를 등용할 수 있다면 내 장차 이것을 하겠다.’라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군주가 만일 ‘내 이것을 잘할 수 있겠다.’라고 말하면 임무를 편안히 받아서 사양하지 않고, 군주가 ‘내 잘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 임금에게 아뢰기를 ‘천하에 저 말고 어찌 딴 사람이 없겠습니까?’라고 사양하였다.
그리고 군주에 이르러도 또한 그러하여, 장차 이 사람을 등용하려고 하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그에게 말해주어서 그의 능하고 능하지 못한 바를 살펴 성공을 책임지웠다.
그러니 “우선 등용해보고 한번 살펴보겠다.”라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잘못인 것이다.
후세의 군자君子들은 나아갈 적에는 못하는 짓이 없어서 행여 뜻이 부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내 장차 권도權道로써 도道를 이루겠다.”라고 하고, 이윽고 도道가 끝내 행해지지 못하면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내 재주를 다 쓰지 못했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자기 몸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종말에는 군주를 비방하니,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를 군자君子라고 생각하나 맹자孟子의 이른바 ‘군주를 해치는 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