蘇長公은 乃歐文忠公極得意門生이니 此序却亦不負歐公이니라
夫言有大而非夸하니 達者는 信之하고 衆人은 疑焉하나니라
文章之得喪이 何與於天이완대 而禹之功이 與天地竝이어늘 孔子, 孟子以空言配之하시니 不已夸乎아
自春秋作으로 而亂臣賊子懼하고 孟子之言行에 而楊墨之道廢하니 天下以是爲固然하야 而不知其功이러니
孟子旣沒
에 有
이 違道而趨利
하고 殘民以厚(生)[主]
하야 其說
이 至陋也
어늘 而士以是
로 罔其上
하고 上之人
은 僥倖一切之功
하야 靡然從之
로되
而世無大人先生如孔子孟子者 推其本末하고 權其禍福之輕重하야 以救其惑이라
故
로 其學遂行
하야 하니 洪水之患
이 蓋不至此也
라
方秦之未得志也
에 使復有一孟子
런들 則申, 韓爲空言
이요 作於其心
하야 害於其事
하며 必不至若是烈也
리라
錯는 不足道也어니와 而誼亦爲之하니 予以是로 知邪說之移人이 雖豪傑之士라도 有不免者하니 況衆人乎아
自漢以來로 道術이 不出於孔氏하야 而亂天下者多矣라
호되 莫或正之
러니 五百餘年而後
에 得
하니 學者以愈配孟子
하니 蓋庶幾焉
이라
愈之後三百有餘年而後에 得歐陽子하니 其學이 推韓愈, 孟子하여 以達於孔氏하고 著禮樂仁義之實하야 以合於大道라
其言이 簡而明하고 信而通하야 引物連類하야 折之於至理하야 以服人心이라 故로 天下翕然師尊之라
自歐陽子之存으로 世之不說(悅)者 譁而攻之하야 能折困其身이로되 而不能屈其言이라
士無賢不肖히 不謀而同曰 歐陽子는 今之韓愈也라하나니라
宋興七十餘年
에 民不知兵
하고 하야 至
로되 而斯文
이 終有愧於古
하고 士亦因陋守舊
하야 論卑而氣弱
이러니
自歐陽子出로 天下爭自濯磨하야 以通經學古爲高하고 以救時行道爲賢하고 以犯顔納諫爲忠하야 長育成就하야
賴天子明聖하사 詔修取士法하야 風厲學者하야 專治孔氏하고 黜異端하니 然後에 風俗一變하야 考論師友淵源所自하야 復知誦習歐陽子之書하니라
歐陽子는 諱脩요 字永叔이니 旣老에 自謂六一居士云이라
體大而思精하고 議論이 如走盤之珠하니 文之絶佳者也라
소장공蘇長公은 바로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의 매우 마음에 드는 문생門生이니, 이 서문은 소장공蘇長公이 또한 구양공歐陽公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말에는 큰소리(흰소리)를 쳐도 과장이 아닌 것이 있으니, 이치를 통달한 자는 이를 믿고 중인衆人들은 의심한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장차 ‘이 문文[사문斯文]’을 망하게 하려고 하셨다면 뒤에 죽는 내가 이 문文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셨고,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우禹임금께서는 홍수를 억제하셨고 공자孔子께서는 《춘추春秋》를 지으셨고, 나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았다.”라고 하셨으니, 이로써 우禹임금에게 짝하신 것이다.
문장文章의 얻고 잃음이 하늘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우禹임금의 공功은 천지天地와 똑같은데,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공허한 말씀(문장)으로써 우禹임금에게 짝하시니,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닌가?
《춘추春秋》가 나오고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였고, 맹자孟子의 말씀이 행해지자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도道가 폐지되었으니, 천하가 이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그 공功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맹자孟子가 별세하신 뒤에 신불해申不害․상앙商鞅․한비자韓非子의 학설이 도道를 저버리고 이익을 따르며 백성을 해치고 군주를 받들게 하여, 말이 지극히 누추한데도 선비들은 이로써 윗사람을 속이고, 윗사람들은 일체의 공을 요행으로 바라서 모두 쏠리듯 이것을 따랐다.
그러나 세상에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처럼 본本․말末을 미루고 화禍․복福의 경중을 저울질하여 의혹을 바로잡아주는 대인大人․선생先生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학설이 마침내 행해져서 진秦나라는 이로써 천하를 잃었고, 침체하여 진승陳勝과 오광吳廣,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화禍에 이르러는 죽은 자가 10명에 8, 9명이 되어 천하가 쓸쓸해졌으니, 홍수洪水의 화禍도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진秦나라가 뜻을 얻지 못했을 적에 만일 다시 맹자孟子와 같은 분이 한 명 더 있었더라면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의 학설은 빈말이 되었을 것이요, 마음에서 나와 일에 해를 끼치며 일에서 나와 정사를 해치는 이단異端의 부정한 학설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양자楊子와 묵자墨子가 천하에 뜻을 얻었더라면, 그 화가 어찌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보다 적었겠는가?
이러한 입장에서 말한다면 비록 맹자孟子를 우禹임금에게 짝하더라도 괜찮은 것이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개공蓋公은 황로黃老의 학설을 말하였고, 가의賈誼와 조조鼂錯는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의 학설을 밝혔다.”라고 하였다.
조조鼂錯는 굳이 말할 것이 없지만 가의賈誼도 이러한 일을 하였으니, 나는 이 때문에 부정한 학설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이 비록 호걸스런 선비라도 면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니, 하물며 보통 사람에 있어서랴.
한漢나라 이래로 도술道術이 공씨孔氏에게서 나오지 않아서 천하를 어지럽힌 경우가 많았다.
진晉나라는 노장학老莊學 때문에 망하였고, 양梁나라는 불교佛敎 때문에 망하였으나 혹시라도 이것을 바로잡는 이가 없었는데, 500여 년이 지난 뒤에 한유韓愈를 얻으니, 배우는 자들이 한유韓愈를 맹자孟子에게 짝하는데, 아마도 거의 옳을 것이다.
한유韓愈로부터 300여 년 뒤에 구양자歐陽子를 얻으니, 그의 학문은 한유韓愈와 맹자孟子를 미루어 공자孔子에 도달하였고, 인의仁義와 예악禮樂의 실제를 드러내어 대도大道에 합하였다.
그리고 그 말씀이 간략하면서도 분명하고 신실信實하면서도 통달하여, 사물을 이끌고 비슷한 종류를 연결해서 지극한 이치에 절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므로 천하에서는 모두 구양자歐陽子를 스승으로 높였다.
구양자歐陽子가 생존하였을 적에는 세상의 공公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시끄럽게 공격하여, 공의 몸을 좌절시키고 곤궁하게 하였으나 공의 말씀을 굽히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선비 중에 어진이나 불초한 이를 막론하고, 상의하지 않고도 똑같이 말하기를 “구양자歐陽子는 지금의 한유韓愈이다.”라고 한다.
송宋나라가 일어난 지 70여 년에 백성들은 병란을 몰랐으며,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고 잘 가르쳐서 천성天聖과 경우景祐 연간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으나, 사문斯文(유학儒學)은 끝내 옛날에 비해 부끄러움이 있었고, 선비들 또한 누추함을 따르고 구습을 지켜서 의논이 낮고 기개가 약하였다.
그런데 구양자歐陽子가 나오고부터 천하 사람들이 다투어 자신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 정신을 연마하여, 경서經書를 통달하고 옛 법도를 배우는 것을 높게 여기며 세상을 구제하고 도道를 행하는 것을 어질게 여기며 군주의 얼굴을 범하고 용감히 간하는 것을 충성으로 여겨 인재人材를 장육長育하고 성취하였다.
그리하여 가우嘉祐 말년에 이르러는 선비가 많다고 알려졌으니, 구양자歐陽子의 공로가 많다고 하겠다.
구양자歐陽子가 별세한 지 10여 년만에 선비들이 비로소 신학新學을 하여 불佛․노老와 유사한 것을 가지고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실제를 어지럽히니, 식견이 있는 자들이 근심하였다.
그런데 천자天子의 밝고 성聖스러움을 힘입어, 조칙을 내려 선비들을 뽑는 법을 닦아(개정하여) 배우는 자들을 격려하고 고무시켜 오로지 공씨孔氏의 학문을 다스리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니, 그런 뒤에야 풍속이 한 번 변해서 사우師友들의 연원淵源의 유래를 상고하고 논하여 다시 구양자歐陽子의 글을 외고 익힐 줄 알게 되었다.
내가 그의 시詩와 문文 766편을 그의 아들 비棐에게서 얻어 차례로 엮고, 논하기를
“구양자歐陽子가 대도大道를 논한 것은 한유韓愈와 같고, 정사政事를 논한 것은 육지陸贄와 같고, 일을 기록한 것은 사마천司馬遷과 같고, 시부詩賦는 이백李白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내 말이 아니라 천하 사람들의 공통된 말이다.
구양자歐陽子는 휘諱가 수脩이고 자字가 영숙永叔이니, 늙어서는 스스로 ‘육일거사六一居士’라고 호號하였다.
“체재體裁가 크면서도 생각이 정밀하고 의논이 쟁반에 굴러가는 진주와 같으니, 문장文章 중에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